▲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글은 성과 이름만 기록할 줄 알면 그만이다’라는 말을 서족이기성명(書足以記姓名) 이라고한다. 이 말은 서초패왕 항우가 어릴 때 했다는 말이다. 너무 많은 학식과 문장만을 내세우는 학자와 당세에 당당한 선비들을 비웃는 그런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식견 높은 문학대가를 조롱하기도 한 말이다. ‘지식보다 행동이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사기> 항우본기(項羽本記) 첫머리에 이렇게 나와 있다.
항적(項籍)이란 사람은 하상(下相) 사람으로 자(字)를 우(羽)라고 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 나이 스물넷 이었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항양(項梁)이었다. 양의 아버지는 바로 초나라 항연(項燕)으로 진나라 장군 왕전(王箭)에게 죽은 사람이다. 항적(항우)은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다가 이루지 못하고 칼싸움을 배우다가 또 이루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
항우의 작은 아버지 항양이 화를 내며 향우를 꾸짖자 향우는 숙부(叔父)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은 성명과 주소 그리고 조상의 지방만 쓸 줄 알면 족하고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할 만하면 만족할 것이니 더 배울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 만(萬) 사람을 대적하는 능력을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한양은 그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항우는 대단히 기뻐했으나 대강 그 뜻과 요령의 기초만을 알고는 역시 그 전문을 끝까지 배우려고 관심과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항우(項羽) 본기의 서두에 나타나 있는 기록이다. 항우는 공부하는 글방에서는 돌대가리였던 둔재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한때 천하를 휩쓸고 뒤흔들게 된 것은 단순히 그의 백절불굴하는 투지와 의지력과 힘과 타고난 용맹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글과 예절 같은 것은 사실상 필요 없었고 칼과 활을 쓰는데 특별한 기술과 요령이 필요치 않았다. 병법이나 적군을 속여서 고묘한 작전이나 배수진 같은 것은 그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한 말처럼 산을 넘어뜨릴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力發山). 그리고 세상을 마구 흔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氣槪勢) 그는 보통사람이 하나만 입어도 충분히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일곱 겹이나 껴입고 다른 장수들이 고작 30근 철퇴를 드는 정도였는데 그는 3백 근 철퇴를 나무 지팡이 휘두르듯 했다. 천리마를 타고 달리는 그의 철퇴 앞에서는 큰칼도 그리고 긴 창도 소용이 없고, 그의 七층 갑옷에는 아무리 강한 화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마치 초음속 속력으로 달리는 탱크와도 같은 역발산의 전무후무한 인간이였다.
그는 유방(劉邦)과 결전 중 연전연승(連戰連勝) 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해하(垓下)라고 하는 지역전투에서 장량의 계략에 의하여 한번 대패하고 오강(烏江)의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함으로써 31세라는 꽃다운 청춘을 장렬하고 처절한 비극으로 끝내고 만다.
역시 글을 읽지 못하고 병법을 배우지 못하고 사회상식과 경험이 어두운데서 온 것이라고 후인들은 논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