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부 고성문화원 이사

가을밤입니다. 두둥실 떠오른 둥근달이 어둠을 밝히는 밤 파아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하고 높기만 합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깨동무하고 불렀던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하는 달 노래가 절로 나오는 10월의 가을밤입니다.
등화가친(燈火可親) 책읽기에 좋은 청량한 밤이기도 합니다.   
온 종일 갈모봉 편백나무 숲을 흔드는 삽상한 바람 속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되자 독서를 합니다. 텔레비전을 볼까했지만 볼만한 뉴스도 없고 마음에 와 닿는 방송물이 없어 독서를 택한 것입니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던 중 나관중 원작 김홍신 편역 소설 ‘삼국지’가 책들로 가득 찬 서가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예전에 일독한 책이지만 다시 한 번 더 읽어 봅니다. 세속에 이르기를 ‘삼국지를 읽어보지 아니한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반면에 ‘나이 들어서는 삼국지를 읽어 보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불혹(不惑,40세)이나 지천명(知天命,50세), 이순(耳順, 60세)의 나이에 쓸데없는 야망이나 권모술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만큼 삼국지에는 세속을 살아가는 처세와 모든 인간사 욕망들이 집결되어 첨예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끄는 인물은 촉나라 제갈공명(諸葛孔明, 일명 제갈량)입니다. 그의 자략과 충정은 삼국지 전편의 핵심을 이룹니다. 나에게는 그와 연관해서 특별히 인상 깊은 장면이 있습니다.
위나라  사마의(司馬懿,일명 사마중달) 와 가정의 전투에서 제갈공명의 당부를 무시하고 자만했던 마속(馬謖)의 군사를 쳐부수고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밤을 도와 달려옵니다. 저 멀리 제갈공명이 있는 서성(西城)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마의는 회심의 미소를 띠우며 군사들을 독려합니다.  만약 필생의 호적수이자 라이벌인 제갈량을 사로잡으면 천하는 자신의 것이며, 역상에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변변한 장수하나 남아 있지 않은 서성에서는 문신들이 하얗게 질린 낯으로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승상,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시 바삐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목숨만은 부지할 것 같습니다. 승상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라고 빗발치듯이 재촉합니다. 그렇지만 제갈량은  미동도 하지 않고 깊은 고민에 빠져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2,500명의 병사들로 어찌 사마의의 15만 대군을 막는단 말인가. 이미 성안에는 죽음의 공포가 퍼져있고. 구원해 줄 수 있는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군사들과 백성들은 알고 있는, 절체절명의(絶體絶命)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사마의 성문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자신의 눈을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됩니다. 아니 이럴 수가!  촉군의 기치와 창검은 간 곳 없고 마치 자신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활짝 열어젖힌 성문, 앉아서 졸고 있는 수문병, 빗질로 길바닥을 쓸고, 물을 뿌리며 태연한 백성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거문고 소리만 들려옵니다. 
성위의 망루를 살펴보니 단정한 차림, 학창의 입고 머리에 윤건을 쓴 제갈량이 지그시 미소를 띠우며 한가하게 거문고를 타고 있지 않은가. 주변의 병사들도 이해할 수 없는 관경에 멍하니 입만 벌리고 넋을 잃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사마의는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리더니 그만 회군해 갑니다. 틀림없이 제갈공명의 함정이나 계교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사마의의 철군이었습니다.
이 전투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석자의 거문고로 대군을 이겼도다. 제갈량이 서성에서 적병을 물리칠 때, 십오만 군사가 말머리를 돌리던 곳. 후인들이 이곳을 가리키며 아직도 의심하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갈량이 보여준 위계는 참으로 절묘합니다.
제갈량은 거문고 연주로 15만 대군을 물리친 이후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사마의는 내가 평생 위험한 짓을 통해 희롱한 바가 없는 사람임을 알고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퇴각한 것이다. 내 하도 궁핍하여 부득이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이 계책을 썼도다.”
 아! 하고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지를, 이러한 기묘한 제갈량의 공성계책 등이 있는 삼국지는 후한 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입니다. 나라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영웅호걸들과 그들을 보좌해 천하를 얻으려는 책사들과 입신양명을 꿈꾸는 무장들이 함께 어우러져 승부를 펼치는 역사대하소설입니다.
그래서 삼국지는 내게 있어서 오늘의 현실을 대입해보고 숙제를 풀어보는 재미있는 문제집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깊어가는 가을밤에 영화보다도, 드라마보다도 흥미롭고 재미있는 삼국지를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