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옛날에는 공부하는 아이들이 책을 밟거나 책을 넘어 다니다가 부모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기도 했다. 책과 글은 사람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의 난중일기 등 11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된 배경에는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인쇄기술과 임금의 일거일동을 누락없이 기록하는 비서관의 정신뿐만 아니라 기록된 문서를 잘 보존하고 관리하여 다음 공직자에게 물려준 선조들의 지혜와 노력이 아울러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한국은 수천년의 세월속에서 수많은 전쟁과 재난을 겪어 왔다. 이러한 전란과 재난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책이 훼손되었으니 이를 서액(書厄)이라고 불렀다. 조선조 중기에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평양성이 함락 당하였을 때 우리나라 문물이 중국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서적을 평양에 모아 불태웠는데 3일간이나 불에 탔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임진왜란 때에도 수많은 서적이 불타거나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가지고 갔다. 또 조선말 일제시대에는 왕실의 궤와 조선왕조실록 등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6.25 동란으로 그나마 있던 서적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각종 전란으로부터 서책을 완벽하게 지켜내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하고 연구하였다. 왕실에서는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서적을 여러 곳에 분산 보관하였고 민간에서는 깊은 계곡 바위에 구멍을 뚫어 서적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진주시 진성면 월정리 마을회관 앞 양지바른 곳에 아담한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바위 전면에는 이안장암(里案藏岩)이 새겨져 있다. 곧 마을의 동안(洞案)을 감추어 두는 바위라는 뜻이다. 동약(洞約)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명부로 동계안(洞契案) 혹은 안(案)이라고도 한다.
이 바위 속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임진란직후 1606년부터 1732년까지 마을 규약을 제정한 동계(洞契) 관련 자료와 이 마을에 사는 10개 성씨의 족보가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원안은 사라지고 1779년과 1797년에 고쳐 만든 동안과 그 후 중수 된 것을 여기에 감추어 보관해 왔다. 이 마을에 사는 10개 문중의 성씨의 족보도 해방 이후인 1960년에 최후로 만들어 넣었다. 일부 가문에서 높은 절벽 중간에 구멍을 뚫어 문헌과 족보를 보관한 사례는 전해오지만 이 마을처럼 바위 속에 마을의 역사를 보관한 사례는 전국적으로 그 유래를 찾기 힘들다. 이 마을은 임란 이전부터 동약을 만들어 환난상율(患難相恤)을 실천하여 결속을 다졌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이 마을 사람들은 각각 뿔뿔이 흩어져 피난하여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마을의 역사기록과 문중의 족보가 처참하게 불탄 것을 목격하였다. 불에 타고 남은 향안과 족보를 수습하여 새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향안과 족보를 보존 할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향안과 족보를 마을 원로가 사는 집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미덥지 않았다. 그래서 일제 초기에는 바위 하나를 구하여 마을 앞에 가져다 놓고 그 아래 네모난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오동나무 궤짝속에 동안과 족보 및 숯을 넣어 바위속에 몰래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3월3일 10개 문중의 대표가 모여 바위를 둘러보고 문헌의 영구보존을 축원하였다. 또 30년에 한 번씩 각 문중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자료를 꺼내어 보존 상태를 살피고 그 사이 새로 태어난 후손이 있으면 동안과 족보를 새로 만들어 다시 바위속에 넣어 보관하기를 현재까지 지속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족보를 넣는 순서도 정하였다. 순차적으로 순서를 바꾸어 넣음으로써 보존의 형평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문중별로 순서를 정하여 돌아가며 모인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 4월4일 이 마을 각 문중의 대표가 마을회관 앞 바위 곁에 모였다. 오래전 출향인 인사도 약속이나 한 듯이 참석하였다. 정자나무 아래에는 조촐한 주안상도 차려졌다. 바위속에 감추어 둔 동안과 족보를 꺼내어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다.
바위를 개봉해보니 동안과 족보는 습기를 머금어 심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마을과 문중의 역사기록을 영구 보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 결국 바위속의 고문헌 원본을 꺼내어 경상대학교 도서관에 영구 위탁하였다. 그리고 동안과 족보 복제본을 제작하여 바위속에 다시 보관하였다.
바위속에 보관해 온 자료 20점 중 중수구동안(重修舊洞案) 1779, 동안(洞案) 1797, 경임동안(經任洞案), 중수구동안(重修舊洞案)1924는 조선시대 향촌 사회를 운영하던 질서와 사회상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고 또 이계의 역사와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학술적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2012년 7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