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영찬 고성JC특우회 회장

우리 집은 14번 국도변 논 가운데 있다. 동쪽에서 보면 ㄱ자형으로 안채와 창고가 앉았고, ㄴ자형으로 난 마당은 논으로 연해 있다. 송학동 고분군에 쫓겨 약 15년 전 아버지 당신의 논에 어렵게 농가주택을 짓고, 마당의 울타리 개념으로 당시 제법 돈 들여 산림조합으로부터 나목을 매입, 공들여 입식을 했다.
소나무, 주목, 목련, 감나무, 대추나무, 헛개나무, 가죽나무, 대추나무, 장미 등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싸리처럼 키를 키워, 봄이면 티 밥 같은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나무를 심었다. 그러니까 15년을 한자리에 꼼짝없이 자라 숲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작년에 기가 찬 일이 벌어졌다. 키가 작은 감나무랑 대추나무를 제외하고 모조리 베어버린 것이다. 당신의 논리는 뜻밖에 간단하다.
“나락에 그늘지면 안 된다!”, “참새 떼가 모여 안 된다!”
나무그늘에 벼는 웃자라서 볍씨가 여물지 않고 참새는 설익은 볍씨를 쪼아 쭉정이를 만들어 버린다는 취지다. 나무를 잘라도 적당히 허리쯤을 잘라도 될 것을 완전히 밑 둥지 싹을 잘라 버린 것이다. 가차 없어나 과실나무에는 어느 정도 은정을 베풀어 명맥을 유지하게 했다. 
 젊었을 때는 돈 벌어 자식 공부시키는 곳에 몰입하였고 이젠 오르지 농사 이외는 추호의 의미가 부여될 수 없다. 거추장스러운 정원은 농사에 대한 차라리 배반인 셈이다. 특별히 하시는 운동 없이 80세로 건강하신 편이다. 당신의 건강 비결은 ‘몰입과 단순화’가 아닌가 싶기에 이미 베어 버린 나무를 보고 대들 수도 없는 형편이다.

 자라는 농작물을 해함에 엄격하지만 거둔 곡식이 창고에 쌓였을 때는 한량없이 자비롭다. 논 가운데 지은 창고라 쥐들은 'free pass'다. 참새들 열 마리 정도는 상시 근무 한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농협 수매를 한 나머지는 친지와 자식들의 식량을 위해 80가마니를 창고에 비치하지만 두세 가마니는 참새와 쥐의 몫이다. 가을 타작 때는 이삭 하나라도 콤바인에 주워 올리시더니 쥐를 잡는 끈끈이 몇 장 이외는 별다른 조치도 않고 원망도 그다지 높지 않다. 참새도 쫓지 않을뿐더러 참새도 사람보고 놀라는 기색도 없다.
 창고안 가정용 정미기에 한 가마니씩 꺼내 “쌀 찧어 놨다 가져가라”는 9자 짧은 전화 목소리에는 아버지로서의 위엄과 애정, 수고, 배려 등 표현조차 혼란스런 묘한 감정들이 다 섞여 있다.

어제는 봄날 집에 들렀더니 목이 잘린 목련에 잔가지가 뻗쳐, 작고 뽀얀 목련꽃을 폈다. 장미는 연두색 잎을 날름날름 펴고 여린 가시를 몸속에서 내어 마치 아버지에 대한 반란처럼 나오고 있었다. 반란 대 진압의 역사는 항시 승자와 패자 없이 요요한 강처럼 흐르듯 나목과 아버지는 그곳에서 공존하고 있다.
 쥐와 새와 고요와 농사와 단순의 철학이 씨 나락 모판위에 봄바람 따라 바삐 옮겨가고 있었다. 며칠 있으면 짧은 전화가 올 것이다. “모판 내자!” 쌀을 얻어먹으려면 최소한의 노동을 제공해라는 엄명이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