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1637년 1월26일 강화도가 청나라 군대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청나라 군대는 해전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안전하다고 방심하고 있던 검찰사의 중책에 있는 김경징은 방어태세는 점검하지 않고 연일 잔치판을 벌였다.
 청나라 군대는 급기야 1월22일 노획한 조선선박 수십척을 이용하여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은 강력한 저항도 못해본 채 강화도는 적군에게 함락되고 김경징은 도주했다. 그 때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으로 남한산성의 전세는 완전히 꺾어지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처절하게 그 해 1월30일 인조대왕은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 할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오랑캐씩 항복의 예식이였다. 항복하기 전까지 조선조정의 신료들은 청 태종을 홍태돈(紅泰豚) 이라고 불렀다. 홍태돈이란, 붉은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바로 그 돼지에게 인조는 치욕스럽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청 태종은 인조대왕에게서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 길에 올랐다 그리고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붙인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단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치는 포로는 조선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명령적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나라 정부는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농업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만명이 넘는 조선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에게서 이 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도망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해야 했다. 그렇게 조선으로 탈출했다가 도로 잡혀간 포로들은 청나라 군인에게 끌려가 발 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병자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게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1664년(현종5) 한 남자가 청나라에서 도망쳐 왔다. 41세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부근에 살고 있던 13살의 소년 양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했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 그는 청나라 군인에게 포로가 되었고 가족들과 생이별 한 채 청국으로 끌려갔다. 그는 심양(審陽)에서 한족 출신 대장에 몸이 팔린 신세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 되었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
  1644년 청나라 태종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에 입성하여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나라 조정은 심양의 거주민들에게 모두 북경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 한 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북경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18년후 39세의 장년이 된 안추원은 조선으로 탈출을 결행하였다. 산해간(山海間)을 통과하여 만주벌판을 가로질러야 했다. 하지만 산해간에서 청나라 군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다시 북경으로 송환된 그는 얼굴에 낙인이 찍히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한심하고 처절했다. 다시 2년이 더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28년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엄중히 금지하고 있는 청나라 정치권 때문이었다. 하지만 28년 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의 백성을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나라의 정보원들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은 이미 오래전에 그의 가족을 풍비박산 내고 말았던 것이다.
 목숨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받아들였을 뿐 생계대책까지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일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나라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였다. 그는 결국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체포되었다. 그리고 체포된 이후 그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십상팔구 처형되었을 것이다. 인조대왕 재임중에 탈출했다가 청나라에 도로 잡혀갔던 조선인 포로들이 청나라 군사에게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전설과 같은 안추원의 비극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
  참혹한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없이 안추원 같은 사람이 생겨났다. 정치인을 잘못만난 죄 때문에 수많은 민초들이 처절한 고통에 신음해야 했지만 정작 비극을 불러왔던 위정자들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강화도의 비극을 초래했던 김경징은 논란 끝에 자살했지만 적과의 싸움을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김자점은 전쟁이후 영의정 자리에까지 올랐다.
  병자호란의 참혹한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살펴보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암혹하고 참담할 뿐이다. 그러나 국가와 장래를 책임져야 할 정치인들이 연출해 낸 장면을 바라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수많은 생명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았던 병자호란때 정치인들의 신용불량이 넘쳐나고 다시 외국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경고음이 들리는 현실에는 귀를 막아버린 것 같은 오늘의 정치인들 민초들의 열망을 외면했던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는 역사를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다시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된다고 했던가.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8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초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