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客淸平寺(유객청평사)하니 春山任意遊(춘산임의유)라.

나그네가 청평사에 들려/ 봄 산 속에서 마음대로 놀아 본다.

鳥啼孤塔靜(조제고탑정)이요 花落小溪流(화락소계류)라.

외로운 탑은 고요한데 새가 지저귀고/ 작은 시냇물 흐르는 위로 꽃이 지네.

佳菜知時秀(가채지시수)요 香菌過雨柔(향균과우유)라.

맛있는 나물은 시절을  알아 돋아나고/ 향기로운 버섯은 비를 맞아 더욱 부드럽다.

行吟入仙洞(행음입선동)하니 消我百年憂(소아백년우)로다.

흥얼거리며 선동으로 들어서니/ 나의 오랜 근심이 사라지노라.

  

 <해설 및 비평>춘천 청평사에서 매월당 김시습이 읊은 '有客(유객: 어떤 나그네)'이란 시로, 당대 혹독한 비평가였던 그는 서거정과 천재성이나 문사(文士)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둘은 당대 최고의 문사 관료였던 이계전(李季甸)에게서 동문수학했던 사이다. 이러했던 사이가 김시습과 서거정 둘 간에 묘한 우정일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계유정난이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芬)1)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이 계유정난2)이다.

 

 이러한 난 속에서 쿠데타 세력에 줄을 선 서거정, 그 반대편에 섰던 김시습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조선의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그는 5세 때 이미 『중용』,『대학』에 통하여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그가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無雨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고 읊었을 정도였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감탄하여 이름을 『논어』 학이편의 글을 따서 '시습(時習)'이라 지었다. 21세 때인 1455년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세상을 비관하고 책을 불사르고 설잠(雪岑)이라 자호하고는 방랑하면서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또한 <금오신화>라는 최초의 한문소설을 지어 우리 문학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이러했던 그가 '서거정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읊은 '상서강중(上徐剛中)'이란 시를 보자.

 

유월급무주(有月伋無酒)/ 달이 있으면 술이 없고

유주급무월(有酒級無月)/ 술이 있으면 달이 없도다.

시광급여전(時光急如箭)/ 시절의 빠름이 화살 같은데

득실전쌍곡(得失轉雙?)/ 얻고 잃는 건 바퀴가 굴러 가는 듯

 

 

 달이 있으면 술이 없고 술이 있으면 달이 없다는 것은 신동이었던 김시습이 '세상사 뜻대로 안 된다'는 뜻이다. 세상사 얻고 잃는 것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음에 비유한다. 그 수레바퀴가 평행선을 달려 각자의 삶은 정반대였다. 서거정은 쿠데타 세력에 줄 서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다. 반면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듯이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반대세력이었다. 혹자의 비평가는 '그가 서거정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무슨 벼슬 등을 주었으면 하는 심정이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벼슬이나 안위를 구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서거정 그대도 언젠가는 내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으니 너무 뻐기지 말라'고 조소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조소는 빗나갔다. 서거정은 여섯 왕을 모시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럭셔리한 삶을 구가했다. 반면 서거정은 김시습이 와서 차를 나누는 고마움을 1수에서, 읊은 자신의 외로운 신세타령을 2수에서 곁들이고 있다. 물론 그도 귀족적인 삶의 한켠에서는 외로웠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김시습이 고한 이에 대한 답시(答詩)인 서거정의 '차운청한견기(次韻淸寒見奇)'를 본다.

 

아유존중주(我有尊3)中酒)/ 나에게는  술이 가득한 동이가 있고

아유지상월(我有地上月)/ 땅위의 달도 있네

이아락치유독(而我樂齒幽獨)/ 그대와 내가 그윽함을 즐기고자 하니

휘수사철앙(揮手謝轍?)/ 손을 저어 함께 하기를 사양하다니

  

 전자의 김시습 시에 대하여 서거정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족함과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달도 술도 다 있는 이 좋은 세상으로 나와서는 권세와 그윽함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사양하니까 '자네에게 부족함이 많은 일이 생긴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서거정은 김시습의 참뜻을 읽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안위를 탐했으면 김시습도 쿠데타 세력인 수양대군의 편에 섰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에게 반기를 든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삶을 살았다.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단종의 왕위찬탈을 거부하고 속세를 떠난 삶이이었기에 무엇을 바라는 아부성은 아니었다. 반면 서거정은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의 중심에서 살았던 면모에서도 쉽게 보여진다. 서로의 교감이 있어 친구였지만 술, 달, 수레바퀴를 제재로 같이 사용하였음에도 두 사람의 성품에서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의 삶이었다. 술도 있고 달도 있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김시습은 쿠데타 그것도 조카를 죽인 수양대군을 저주하고 저항하면서 비판하는 자유로운 삶을 택했다.

 

 권력의 편에 늘 섰던 서거정도 자연의 법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만년에는 늙은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던 광나루 부근의 쌍수정(雙樹停)에 자리 잡고 강호생활의 낭만과 여유로움을 만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유유자적함을 즐기기도 했던 그는 성종 18년(1487년) 68세 때 왕세자인 연산군을 위해『논어』를 강하였지만, 이듬해인 1488년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광나루의 아름다움과 정취에 취하여 홀로 오가던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4)  

 

 김시습은 스승인 이계전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동조하여 공신록에 오르자 스승은 물론 동문인 그의 아들까지도 내왕을 끊었다. 운명의 장난은 김시습과 서거정에게 서로 다른 삶을 걷게 하였지만, 둘은 조선조에서 가장 많은 시문을 남겼고, 나름대로 최고의 업적을 낳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김시습은 부도덕한 정권에 평생 저항하는 삶이었고, 서거정은 정권에 충실하면서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후세 역사가는 항상 약자나 소외된 자의 편이라서 김시습에게 후한 평을 하지만, 그렇다고 서거정도 그의 인물됨과 업적을 함부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관료로 활동한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한 사림파(士林派), 그리고 이 둘에 속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부른다. 서거정이 관각파의 대표였다면 김시습은 방외인의 대표였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유교적 명분을 뒤흔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은 김시습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삼각산에서 과거공부를 하던 중 삼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다가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고 평생 방외인으로 방랑의 생을 보냈다. 물론 그의 이러한 행보가 자신으로 하여금 <금오신화>를 쓰게 하였고, 차를 벗 삼아 다성(茶聖)으로 우뚝 서게 하였다. 이에 반해 서거정은 침묵했다. 조선시대 초대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외손자로 태어날 때부터 최대 문벌가의 자손이었던 그는 세조 정권에 충실하였고, 그때부터 대제학을 23년간 독점하게 된다. 대제학 가문의 명성을 이어간 인물이다. 실로 대단한 처세술이 아닐 수 없다. 괴팍하고 신경질적인 면도 있어 보이는 김시습의 천재성을 알아본 서거정이 후일 그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리란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율곡 이이가 <매월당집>에 남긴 두 사람 간의 일화가 이를 잘 대변한다.

 

 김시습은 서거정을 '강중(剛中:서거정의 자)'으로, 서거정은 김시습을 '설잠(雪岑:매월당 김시습의 호)'이라고 불렀다. 서거정은 문벌(文閥)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김시습은 변변치 못한 무반(武班)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탓에 무골의 영향이 김시습으로 하여금 불의를 참지 못하게 하고 초야에 묻힌 삶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함을 볼 때, 둘의 우의가 만만치 않았던 점이다.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둘 다 문사로서의 능력과 인물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김시습은 동문수학한 선배인 서거정에게 손수 재배하여 만든 작설차를 보내고 우의를 다졌다. 이러한 일화를 들어 '서거정의 인간미가 보이는 듯하다'고 혹자들은 평하나. 유독 그렇지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에게 냉혹함 등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서거정이 남긴 차(茶) 시는 32수나 전한다. 이러한 점은 차5) 시로 김시습과 교유했다는 반증이다. 서거정은 김시습 외는 널리 교유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냉정한 면이 있어 국정 외는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서거정은 자신의 운명에서 최선을 다한 처세술의 달인으로 보이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고픈 게 문필가였음이 다반사임에도 김시습과 달리 그는 그러하지 않은 삶을 산 것만은 분명하다.

   

1)조선조 집현전 학자 정인지의 매형이었던 정분(鄭芬)은 려말~조선조 정이오의 아들이자 진양정씨 충장공파 시조다. 수양대군의 합류를 끝내 거부하자 처와 함께 관노비로 전락하여 사약을 받은 그는 조선조 세종과 단종대 충신이자 청백리였으나 숙종 때 복권돼 그 후 절육신으로 추존되었다. 역적 아닌 역적으로 몰려 그 후손들은 300년간 벼슬에서 멀어져 갔다. 본 비평가가 그의 35세손이기도 하다.

 

2)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고, 당시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지 않은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권씨가 세자빈 때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문종은 유언으로 영의정 황보인과 남지(南智), 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죽인 후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 고 보고하고는 곧 왕명을 빌어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여서 사전에 계획한 대로 반대파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 정분과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 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3)尊; '술통(술동이) 존'을 뜻함에 원문은 앞에 '나무 木'가 붙어 16획이나 인터넷 사전의 용량이 모자란 탓에 이렇게 표기 한다. ?를 '술통 존'으로도 사용하나 원문은 그렇지 않기에 전자에 따른다.

 

4)사후 광나루 건너편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뼈를 묻었으나,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개발의 여파로 경기도 화성에 이장되었다.

 

5)당시 서거정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서면 양수리 '두물머리' 부근  운길산 내 수종사(水鐘寺)에 자주 들리기도 했다. 이 절은 세조가 강원도 상원사에 피부병 치료차 다녀오다 들린 길에 '수종사'로 명명하고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현존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소재 운길산역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다. 수도권 등산객이 들끓는 그 주변 예봉산 아래는 정약용의 생가도 있다. 당시 이 절의 주지는 짚신 한 컬레를 내놓으며 서거정의 방문을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고 전하며, 서거정 또한 이 절의 풍광에 대하여 '동방의 사찰 가운데 최고의 전망'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