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찬 고성JC특우회 회장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고향 전남 벌교로 가는 길에 모처럼 단비가 내렸다. 7월, 8월 내내 땡볕으로 달궈 옛날 같으면 고을 현령이 기우제라도 올려야 할 판국에 고마운 비가 내렸다. “진즉 갔어야 진작 비가 내렸을 텐데” 하는 망상에 말을 걸어봤다. 쏟아지는 빗속 벌교읍사무소에는 영호남 화합차원에서 토요일임에도 문을 열어 고맙게 일행을 맞아 주었고 더불어 다소 생경한 남도 사투리의 예쁜 문화해설사를 붙여 줬기에 근세 일제강점기의 벌교문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나 했다.
비를 맞으며 벌교인과 고성인이 함께 오른 산은 부용산이었고 그 산에는 죽은 누이동생의 절절한 추모시가 「제망매가」처럼 노래되어 있었다. 한때는 빨갱이들이 즐겨 불렀다하여 금지곡이 됐다가 지금은 희미하게 구전돼 오며, 버스로 이동 중 불러준 해설사의 구슬픈 ‘부용산’ 노래는 일행의 심금을 잠시 적시기에 충분했다.
벌교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전령지로 발전되었고 해방후로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지로 퇴락한 도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판소리, 녹차, 갯벌과 꼬막, 주먹자랑 할 수 없는 고을,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이 있는 도시가 전부인 작고 조용한 도시지만 어쩐지 역사의 전기가 한(限)이 돼 등뼈를 통과하는 듯한 싸늘한 전율이 일었다.
1935년에 지어졌다는 ‘보성여관’은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된 전형적인 일본식 2층 건물로 외관은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내부는 격자형 미닫이문 다다미방으로 당시에는 5성급 호텔인 셈이었는데, 금성TV, 트랜지스터라디오 등은 어째 부조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이것이 보성여관이 오롯이 보존된 변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 자원 수탈 목적으로 대영제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든 동양척식회사가 벌교에도 있었다고는 하나 그 잔존의 건물은 보이지 않고 소위 ‘온정통’이라 불렸던 일본인 거리에는 희미한 흔적들만 묻어 있었다.
태백산맥의 시작은 ‘소화’로 시작된다. ‘소화’는 무당의 딸로 태어난 모태 무당이었다. 일본 연대기에 붙은 썩 내키지 않은 이름이긴 하지만 소설의 한 축을 형성하고 아직도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소화교’는 일본이 건설하였고 여·순사건 때 수천 명이 총살당한 통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 여·순반란사건?”이라고 아는 체를 좀 했더니 하대치 닮은 벌교 이재우씨가 바로 비수처럼 날아왔다.
“어, 거시기, 여·순반란사건이 아니랑게요, 여·순사건이랑게로!” 갑자기 몸 둘 바를 몰랐다. 1995년 이후 재조명, ‘반란’이 빠진 ‘여.순사건’이 정식 이름으로 명명됐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지면을 통해서라도 무지를 사죄드리고, 황선오 벌교 읍장님, 문창진 보성읍 사무관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