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균 고성문화원 향토사연구원

▲ 씨앗 다래끼

며칠 전 강원도 고성 거진포 지방 어촌마을에 간 일이 있다.
어촌 마을이라 논밭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산골짜기로 들어서니 산간에 삐뚤삐뚤한 논 몇 뙈기를 앞에 하고 농가 십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행정력이 덜 미치는 산속이라 그런지 아직 스레트 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봄 작물 파종이 막 끝난 5월 초순이라 경운기랑 관리기, 호미, 괭이가 그대로 논, 밭 이렁에 내팽개쳐져 있다.
동구(洞口)를 벗어나 공터 앞을 지나려니까 비닐 포장지며 깨진 병, 휴지조각 같은 것이 너저분하게 쌓인 쓰레기더미 속에 뭔가 이상하게 눈길을 끄는 것이 삐죽이 한 모습 드러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씨앗 다래끼 하나였다.
흙과 연탄재에 범벅이 된 데다 본래 좀 썩어 있었는지 거무티티한 게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다래끼를 쓰레기 더미에서 꺼내 툭툭 털어 주위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솜씨가 형편없이 거칠고 투박했다. 어릴 때 더러 멍석이며 망태따위를 보고 함께 생활하여 자랐지만 이렇게까지 막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새끼를 굵게 꼬아 날을 세우고 짚을 듬쑥 듬쑥 집어 꾹꾹 박아 그냥 튼튼하고 두껍게만 만들었다. 한마디로 세련미랄지 정교함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먼 물건이었다.
그 다래끼를 가지고 고추모, 참외모, 수박모 등을 담아 어깨에 메고 집 앞 텃밭에 마련된 이렁에 옮겨 심는 작업에 몰두 할 때 이웃집 할머니들과 천해지 조선소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귀한 물건’이라며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 다래끼는 지금 나의 집 창고 한쪽 벽에 걸려 있다. 처음 가져왔을 때는 번쩍거리는 현대가구와 어울리지 않아 몹시 어색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그런 기분도 차차 없어지고 이제는 그렇게 푸근하고 정다울 수가 없다.
나는 가끔 눈길이 그 다래끼에 머물면 그것을 어깨에 멘 농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한다. 요즘 농부가 아니라 아득히 멋 옛날 농경생활이 시작되던 무렵의 농부의 모습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된 건 대략 신석기 시대 후기쯤으로 보니까 그 때 우리 조상들은 본래부터의 수렵과 어로에 소규모의 농경을 곁들여 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 흔히 볼 수 있었던 화전민의 생활을 미루어 상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들도 짐승 또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과 함께 비옥한 땅을 찾아 이리저리 거주지를 옮겨 다녔을 것이다.
짐승가죽으로 몸을 두르고 돌창이나 돌칼, 또는 차츰 쓰이기 시작하던 청동제 무기나 농기구를 든 우리 조상들이 거주지를 옮길 때면 제일 먼저 소중하게 챙겨 들고 나섰을 게 무엇일까.
바로 저 씨앗 다래끼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저 씨앗 다래끼는 돌창이나 돌칼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석기 문화가 청동기 문화로 해서 차츰 밀려나 버린 것과는 달리 지금까지 수천 년간 우리와 생활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짚 문화만큼 우리와 밀접했던 것이 또 있을까. 짚은 우리 모든 생활의 밑거름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집짓기에서 각종 생활기구는 물론 가장 천하고 더러운 곳에서부터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데에까지 짚이 쓰이지 않는 곳은 거의 없었다.
사람은 우선 태어나면 짚더미 위에 던져졌다. 짚자리라고 해서 산모가 진통을 하면 깔아주었다가 해산 후 태와 함께 거두어 내다 불살랐다. 죽으면 멍석에 말아내다 묻었으며 변소에선 화장지 대용으로 썼고 잘게 썰어 비료의 주성분으로 사용했다.
그런가 하면 금(禁)줄이라고 해서 모든 신성한 곳을 지키는 상징으로 썼고 다도해 지방에선 짚으로 용신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으며 지신을 모시는 터주가리도 짚으로 엮어 만들었다.

짚은 거의 상품이 될 수 없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니까 짚은 물론 짚으로 만든 공예품도 거의 상품이 될 수 없었다.
몇 가지 손놀림만 익히면 누구나 쉽게 짤 수 있는 게 짚공예였다.
상품이 되지 않으니까. 잔재주나 헛꾸밈이 필요없이 솔직하고 단순했다. 소박하기만 하고 뛰어나게 아름답지 않으니까 예술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반면 우리 민족의 심성이 가장 가식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짚공예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꽤 넓은 유산 문화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꽤 넓다고 하는 영역도 그 문화가 이루어지던 시대의 사회내지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나누어 보면 크게 몇가지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가장 광범위하고 또 풍부한 불교문화,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다져지기 시작한 귀족문화, 유교문화, 도교문화, 조선시대 여자들이 규방으로 쫓겨 들어가면서 이룬 규방 문화, 그리고 지금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서민문화 등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꽃피던 시대에 밑바탕을 이루고 배경이 되어 그 찬란한 문화가 있게 한 기층 다시 말해 서민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없이는 그 예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씨앗 다래기 하나를 주어 놓고 나는 새삼 깊이 우리에게 어떤 것이었나를 확인하고 소중한 것에 대한 체계있는 연구가 우리 향토사 연구소에서 왜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