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흙 덤이 위에 영겁의 세월을 두고 기이하게 솟아 오른 바위들. 그 틈 사이로 뿌리내려 수많은 연륜을 거듭하는 동안 싸늘한 바람과 눈서리를 맞으며 모진 고갈에 시달려 둥치만 굵어진 난쟁이나무가 되고 말았다.
 찬바람과 무서리에 새빨갛게 멍들은 잎새를 본받아 아래로 퍼져갔다. 산기슭까지 번진 선혈 같이 붉은 단풍이 바람 부는 벌판의 불길처럼 훨훨 타올라 만산홍엽의 요원이 되었다.
 가을 산에 가득한 단풍은 빨갛게 보이지만 붉음이 넘쳐 검붉기도 하고 조금 연하여 주홍빛깔도 있고, 갈색과 노랑을 띈 것들도 있다. 빨강에 보라를 겹치고 초록을 겹친 나뭇잎이 있는가 하면, 샛노란 형광색의 영롱한 은행잎 단풍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온 산을 아름답게 장식한 단풍잎이 각색이라 육십사 색 유화물감 한 벌의 색깔로도 표현이 부족하다. 물감을 섞어서 채색을 내는 조색솜씨를 발휘해도 연출이 미흡할 고운 색깔들로 뻗어 내린 능선과 유곡에 형형색색으로 조화롭게 배색하여 흐드러지게 수를 놓았다.
 우뚝하게 솟은 봉우리에서 뻗어 내린 웅장한 산릉선은 척릉을 굽어서 모롱이를 굽이굽이 감돌아 계곡 따라 깊숙한 협곡으로 이어간다.
 흩어지듯 붙박인 모서리 닳은 바위사이로 하얀 물줄기가 가득 머금은 찬란한 산색을 해맑은 산의 소리로 도란도란 내뱉으며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다. 명경같이 맑은 물에 뜬 노랗고 빨간 단풍잎이 일엽편주 되어 맴돌다가 바위를 스쳐 흐르는 급류를 만나 빠지는 듯 떠난다. 사공 없는 배라 예고 없이 만난 작은 폭포를 피할 길이 없다.
 폭포 아래에 패인 조그만 웅덩이의 잔잔해진 물속에 비친 흰 구름 속으로 유유히 헤엄치는 물 빛깔을 닮은 산천어의 유연한 몸짓은 더 없이 한가롭다.
 
 소슬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 사이로 날아든 산새의 나래소리가 소름이 일 것처럼 괴괴하던 가을 산의 정취를 산산이 깨뜨리고 만다. 고개 돌려 눈길이 따라가 보지만, 들리는 듯 가느다란 작은 멧새의 명주실 같은 지저귐만 귓전을 맴돌 뿐 첩첩산중은 고즈넉하기만 하다. 다시 고요 속으로 되돌아가는가 싶더니 한참 후에야 푸르르 나는 이름 모를 산새의 멀어져 가는 예쁜 모습 뒤에는 노란 단풍잎이 흩날려 뱅그르르 돌면서 사뿐히 내려앉는다.
 등산객의 신기로워하는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는 다람쥐의 귀여운 재롱이 가을 산의 운치를 드높여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가쁜 숨을 몰아 벼랑위의 바위 끝에 앉으며 마르지 앉는 땀을 닦아내는 수건이 따가워진 눈을 진정시키기에는 너무 젖어있었다. 굽어보는 경개는 가을 산바람 보다 더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놀랍도록 화려한 풍치에 저절로 탄성이 질러짐을 어이 소양이 부족한 소치로 치부하랴.
 해가 중천에 이르려 하는 아침나절에도 산자락의 작은 골짜기에는 채 걷히지 않은 안개가 깔려있다. 뿌연 안개 속으로 아련하게 보이는, 면사포 안으로 살며시 고개 숙인 신부의 홍안 같은 유난히 붉은 단풍이 더욱 아름다워서 산의 운치를 돋우어 준다.
 수려한 산하를 굽어보면서 찬란한 산경에 빠져든다. 그윽한 심원으로 들어가 아담한 산재에 머물면서 풍광을 즐기고 자연의 경관에 심취해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깎아지른 듯이 우뚝하게 솟아올라 태고 적부터 물려받은 이끼 옷 입은 천태만상의 입석들 사이로 뿌리 내린 나무들이 못다 자란 나이 먹은 가지를 움츠리고 아슬아슬하게 벼랑을 붙든다. 생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갈명의 세월에 곧게 뻗어 자라지 못하고 몸집만 굵어졌다. 불거져 나온 몸매가 부끄러워 빨갛게 붉힌 단풍잎 손으로 가리고, 서러움에 북 받힌 멍든 잎을 소슬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다.
 낙엽 구르는 중봉 위의 산길을 따라 하늘 가까이 오를수록 굵은 나무둥치에 나이 먹은 겉껍질이 두덕지가 된 키 작은 나무들이 군락을 이룬다. 인고의 일생을 서러워하는 난쟁이나무들이 산등성이의 쌀쌀해진 세찬 바람을 만나 구슬픈 울음으로 설움을 토한다. 단풍잎 잃은 앙상한 가지가 티 한 점 없는 하늘을 손가락질 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바위벼랑을 돌아서 저편 바위너설 너머로 하늘 높이 치솟은 산정을 향해 용기를 내어 다가가면 바위 모퉁이로 모습을 내미는 더 웅장한 준봉은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한다. 온 몸에 힘이 빠져 나른해지면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지만 눈앞에 보이는 절정 아래서는 잠시의 휴식에도 힘이 솟는다. 걸음을 재촉하여 지체할 수 없이 흐르던 땀이 다 말라 외려 뽀송뽀송해져서 상기된 얼굴로 애써 도전하던 정상에 도달하는 쾌감을 맛본다.
 가파른 비탈길을 전력으로 올라 산꼭대기에 첫발을 딛는 그 성취감으로 미묘한 환희의 순간을 맞는다. 확 트인 시야로 산 너머 수려한 산색과 아득한 점점 산의 가경에 매료되어 맑은 하늘로 솟아오른 듯하다. 발아래 펼쳐진 오색융단으로 펄럭이는 가을 산과 만학천봉을 정복한 것 같은 가슴 벅찬 감정에 빠져들어 산의 정취와 어우러진 오묘함으로 신비스러움을 모두 표현하기 어려운 이것이 무한경이던가. 말로서 형용하기 어려운 쾌감으로 산을 오르는 고통스러움과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고 그 극치에 다시 도달하고 파 진다.
 뻗어 내린 능선과 산릉을 이은 유곡은 호두 각피의 올록볼록한 모양을 닮아있었다. 웅장한 능선과 계곡이 억겁의 나날을 맞으면서 기묘한 형상으로 어우러진 수려한 절경 속에 기나긴 세월의 심오한 사연들이 깊이 간직되었다가, 두꺼운 껍질 안에 숨겨진 호두알의 맛 같은 구수한 산 향기 되어 온 산에 은은히 퍼져 나온다.
 산을 반기는 산사람의 가슴마다 향기는 스며들어 산을 향한 연정이 된다. 날이 지나면 다시 그리워져 고행의 등정 길을 걷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수선하던 정상의 소란을 거둬가는 산인의 발길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찬란한 단풍으로 불타오르는 산릉은 고요하여 산마루의 서러움에 지친 키 작은 고목은 적막으로 쓸쓸함을 달래는데, 마지막 남아 적연에 젖었던 길손도 마저 떠나 정적으로 남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