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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촌 추모 서예대전에 즈음하여
논설위원 심상정
2012년 11월 09일 (금) 11:39:08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고성은 산자수려한 고장으로 예부터 산수를 평하여 ‘산악이 언틀먼틀하고 바다는 출렁출렁하여 정기(精氣)가 모이고 영기(靈氣)를 길러 영웅호걸이 세대를 사이에 두고 나왔다.’고 했다. 인재가 자랑거리로 회자되고 있는 고성에서 행촌 선생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서예대전을 개최하여 서예부문의 인재를 발굴함은 물론 고성문화의 위상을 진작시키는 일이라 대회를 주관한 문화원 관계자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바이다. 행촌 선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문집이나 자료들이 임란 등의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전해지는 문집이나 유물 또한 거의 찾을 수 없어 그 이름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이에 「철성지」와「고성지」에 나타난 행촌선생과 행촌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갈천서원을 소개하여 선생을 추모하는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이해를 돕고자 한다.
 〔갈천서원(葛川書院)〕은 고려 공민왕때 문신인 문정공 향촌 이암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고려 공민왕 때 회화면에 금봉서원으로 세웠는데, 조선 숙종 38년(1712년)에 지금 있는 자리(고성군 대가면 갈천리 1146)로 옮겨 세우고 갈천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6년(1869)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우, 강당, 내삼문과 정문인 불사문이 있고,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3량 구조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가운데 1칸을 대청으로 하고 좌우에 방 1칸을 두고 우측방 앞에 누마루가 있다. 정문인 불사문은 앞면 5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 솟을대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1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성지」에 이르기를
 고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강희(康熙) 임진년(壬辰年: 숙종 38, 1712)에 중건하였다. 문정공(文貞公) 행촌(杏村) 이암(李嵒), 지평 묵재(墨齋) 노필(盧㻶), 대사간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을 병향(幷享)하고, 함풍(咸豊) 갑인년( 철종 5, 1854)에 문열공(文烈公) 도촌(桃村) 이교(李嶠)를 추향(追享)하였다. 최일대(崔一大)의 중수기(重修記)에 대략 이르기를 “갈천서원(葛川書院)은 행촌 이선생(李先生)과 묵재 노선생(盧先生), 관포 어선생(魚先生) 등 삼현(三賢)을 병향한 곳으로서 계산(溪山)이 밝고 문채가 나며 천석(泉石)이 맑고 기교하다. 대체로 이 고을은 세 선생의 장구(仗屨)가 머물렀던 곳이다. 지난 날 고을 사람들이 이선생과 어선생이 사우(祠宇)를 고을의 북쪽 웅곡(熊谷)에 세웠는데 임진년의 병화에 남김없이 타버리고 건립한 연대조차 상고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숙종 임진년(壬辰年: 숙종 38, 1712)에 어선생의 서원을 갈천(葛川)의 위쪽 혼돈산(混沌山)의 아래에 다시 세웠는데 선생의 장구가 머물렀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원임(院任)은 이석항(李錫恒), 문이태(文以泰), 전성직(田聖稷)이다. 그 후 신축년에 사림의 중의(衆議)로 이(李)와 노(盧) 두 선생을 추향(追享)하니 서원의 모습이 비로소 갖추어졌다.”라 적고 있다.
 
 이암(李嵒) 선생은 고려 충렬왕 23년(1297년)에 고성에서 태어나 공민왕 13년에(1364년 ) 졸하니 향년 67세였다.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이라 하였고 고려의 문신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감찰대부세자원빈(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瑀)의 아들이다. 1313년(충선왕 5년) 26살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 재주를 아끼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秘省校勘)에 임명한 뒤 여러 번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겸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여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여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당문학(政堂文學),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提學) 정사도(鄭思道)와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지만, 환관 고룡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왕에게 진언한 일로 밀성(密城)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서거하자 서자인 저(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여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1359년(공민왕 8년) 홍건적이 침입하므로 문화시중으로서 서북면 도원수가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핍박하므로 왕을 따라 남행(南行)하였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하여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하였고, 손수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필법은 조맹부와 대적할만하며 지금도 청평사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우리나라 서예사의 명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맹부(趙孟頫)는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서예가이다. 자는 자앙(子昂), 호는 송설(松雪), 별호(別號)는 구파(鷗波), 수정궁도인(水精宮道人) 등이며, 오흥 사람이다.
 조맹부의 시, 서, 화, 인에 모두 능했는데, 후대의 서예에 큰 영향을 준 ‘조체(趙體)’라 불리는 독창적인 글씨를 만들었다.
 조맹부의 그림에 사용된 소재는 산수, 인물, 동물, 화조(花鳥), 죽석(竹石) 등 손대지 않은 게 없어, 후대인이 넘어설 수 없을 정도이다.
 ˂참조˃ : 「고성지」「철성지」「황선균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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