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는 오랫동안 심사숙고에 잠겨 있다가 문득 경상감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감사의 입장이 곤란하지 않도록 내가 성상 전에 직접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보고문서)를 올려 치사(致仕)의 허락을 구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러면 감사의 책무는 그것으로서 완수한 것이 될 것이외다.” 그리하여 퇴계는 임금에게 벼슬을 사양하겠다는 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이른바 무오사직소(戊午辭職疏)라는 것이다. 이 때 퇴계는 58세였는데 그 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첨지 지중추부사(前 僉知 知中樞府事) 신 이황(臣 李滉)은 목욕재계하고 삼가 두손 모아 엎드려 절하옵고 주상전하(主上殿下)께 아뢰옵니다. 신이 듣사온즉 옛날의 성제명왕(聖帝明王)들이 사람을 쓰실 때에는 각자의 재능을 헤아려 재능이 큰 사람에게는 큰 일을 맡기고 재능이 작은 사람에게는 작은 일을 맡기고 이도 저도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냥 물리쳐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윗어른이 잘못 아시고 채용하셨다 하더라도 선비된 자가 자기 재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임을 깨달아서 스스로 물러나기를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사람 쓰는 법도는 마땅히 그러해야만 그릇됨이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서 대신(大臣)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는 일이 없을 것이옵고, 소신(小臣)도 자기 직책을 재능대로 충성스럽게 다해 나갈 것이옵고, 재능이 미치지 못한 자는 야(野)에 물러가 제 능력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옵니다. 현(賢)과 우(愚)가 제각기 자기 자리를 지켜나가며 예양(禮讓)을 지켜 나가야만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되옵니다.

 만약 그러한 법도가 제대로 정립(定立)되어 있지 않아서 소(小)로서 대(大)를 대행하게 하고 단(短)으로서 장(長)의 구실을 하게 한다면 이는 진실로 국가의 큰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모기(蚊)가 산을 짊어질 수 없고 작대기가 큰 집을 지탱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온데 감당하기 어려운 직책을 무리하게 맡기면 그는 신성한 국록을 더럽히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본인으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형벌일 것이옵니다. 또, 그 선비가 지각과 절조가 없어 그런 일을 맡았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그릇 채용한 것은 분명 조정의 잘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런 일이 거듭되면 나라는 기울고 도(道)는 어지러워져서 정치가 크게 문란해질 것이므로 본인의 사퇴의 청원이 있을 때에는 응당 받아들여야 옳은 줄로 아옵나이다. 옛날 맹자(孟子)는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에게 말하기를 “가까운 신하들이 모두 ‘그 사람은 어진 사람이올시다’하고 말하더라도 그 말만 믿고 등용해서는 아니 되옵고 여러 대부(大夫)들이 모두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이올시다’하더라도 그 말만 듣고 등용해서도 아니 되옵고 온 국민이 다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이올시다’하고 말해야만 그 사람을 잘 살펴보셔서 등용 하옵소서” 하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송(宋)나라의 대학자인 주희(朱熹)도 사대부(士大夫)의 진퇴(進退)는 도리에 합당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잡힌다하고 말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맹자나 주자같은 현인(賢人)들이 이미 그렇게 말했거늘 성상께서 그 사람의 현우(賢愚)를 가리지 아니하시고 한 갓 허명에 떠있는 소신에게 은명(恩命)을 거듭 내리시오니 자신의 재덕을 돌보지 않고 은명을 망령되이 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한 일이 아닐까 하옵나이다.
신이 본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병이 골수에 들어 재능적으로나 건강적으로나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면서 한 두 사람의 천거를 믿고 관직으로 부르심이 여러 차례 있었사옵고 신은 사퇴의 청을 여러 차례 올렸으나 그것조차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일이 거듭되면 옳고 그름과 어질고 미련함을 분간하기 어렵게 될지도 모르니 이는 신이 크게 걱정하는 바이옵니다.
 신은 본디 사람됨이 어리석어 일반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도 부족한 편이온데 성상께서는 거듭 은명을 내리시니 만일 이를 받들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성상을 속이는 결과도 될 것이옵니다. 그로 인해 나라의 기강이 크게 문란해질 것이니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현재 성은에 의하여 중추부사(中樞府事)라는 직함을 받들고 있사온데 그것 역시 사퇴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어름어름 삼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진작 사퇴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있는 중이온데 이제 또다시 벼슬을 내려 주시겠다 하오니 신은 그저 황송함이 있을 따름이옵니다. 어떤 분이 신을 벼슬자리에 추천한 것은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사오나 실상인 즉 건강면에 있어서도 도저히 중책을 감당치 못할 형편이옵니다.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어려서부터 임금 섬기는 도리를 배웠음으로 부르심을 받으면 응당 기꺼이 응해야 함을 모르지 아니하옵니다. 그러나 의(義)란 과연 어떠한 것이겠나이까. 의란 반드시 의당(宜當)한 것이라야 할 것이옵니다. 어리석으면서도 어리석지 않은 척하고 벼슬을 도적질 한다면 과연 그것을 의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병으로 폐인이 된 주제에 헛되이 국록만 받는 것을 과연 의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을 과연 의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직무를 대하지도 못할 형편에 물러나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의라고 할 수 있겠나이까.
 이상과 같이 다섯가지 옳지 못함을 가지고 조정의 벼슬자리에 다시 오른다면 신하된 의리를 어디서 구해야 옳으오리까. 그러므로 신이 벼슬을 사퇴하고자 함은 성상에게 대한 의리에도 그대로 부합되는 일이옵니다.
 공자님의 말씀에 ‘위(位)에 있으면 힘을 다하다가 감당할 수 없으면 곧 그만 두는 것이 옳다’ 하는 말씀이 있사옵니다. 신이 벼슬을 물러나고자 함은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신은 근력이 그런대로 지탱할 수 있어서 부르심에 응하였사오나 이제는 신병이 전보다 훨씬 더 쇠약해졌으니 어찌 나아가 어명을 받들 수 있겠나이까.

 이제 성상께서는 현인(賢人)을 초빙하시고자 하는 생각에서 한낱 우신(愚臣)을 부르시오니 소신이 두렵고 위축되어 사양하는 것이 어찌 분수를 지키는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나이까 계묘(癸卯)이래로 14년동안에 소신이 서울에 있으면서 사직하여 체직(遞職)된 것이 열 번이엇고 임명을 받고도 사퇴한 것이 네 번이었고 물러나 시골로 돌아온 것이 네 번이었고 지방에 나가 있으면서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여섯 번이었고 부르심을 받고도 사퇴하기를 청한 것이 세 번째이옵나이다. 나이 60에 백가지 병이 얽혀 몸은 마르고 시들어 쇠약해졌고 정신은 혼미하고 착란하오니 어찌 감히 왕사(王事)에 종사할 수 있겠나이까. 신이 이러고도 어찌 벼슬에 나아갈 수 있겠나이까. 수치지심(羞恥之心)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것이온데 어찌 신인들 없을 수 있겠나이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어리석고 우둔함을 살피시고 신의 병들고 쇠약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신의 청원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제 신이 상소(上疏)한 말씀은 그것이 비록 사사로운 문제에 관한 것이오나 크게 보면 조정의 상풍(上風)을 맑게 하는 데도 크게 관계되는 일이옵니다. 신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런 사퇴소를 올리오니 전하께서는 밝은 재량을 내려주시옵소서. 신은 절실하고도 간곡함을 이기지 못하와 삼가 이 글을 올려 아뢰옵고 묻자옵나이다. 무오년 6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