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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배길
2021년 08월 27일 (금) 11:24:07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최근 방송매체나 교양서적을 통해 역사분야의 연구 성과들이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넓게 전달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역사에 대한 친근감도 높아지고 잘못된 인식 또한 많이 바로 잡히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한국사에 대해 꽤 수준 높은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특정 시대의 모습을 다른 시대에 적용하거나 잘못 형성된 선입견을 그대로 지닌 채 역사를 바라보는 습관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유배길 또한 이러한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배형은 유배살이 또는 귀양살이로 잘 알려져 있는 형벌로 죄인을 특정 지역으로 보내 특별한 사면이 없는 한 그곳에서 기한 없이 강제적으로 살게 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 유배형을 받아 유배길에 오르고 유배살이 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배 관련 기사가 자주 등장하고 관직에 나간 사람치고 유배길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대부들이 유배살이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배형의 실상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는데 이는 유배형의 집행과 운용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배지가 어떻게 배정되고 어떤 방식으로 압송되어 갔는지 등 유배길의 실제 모습을 유배인들이 남긴 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유배형의 규정과 운영
국왕(임금)이 죄인을 유배 보내라는 하교를 내리면 담당관청에서 구체적인 유배지를 선정하여 윤허를 받아 시행했다.
조선시대 형률의 근간이 되었던 ‘대명률’에서는 유배지를 2,000리~2,500리, 3,000리 등 세 등급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는 영토가 광대한 중국에 알맞게 제정된 규정이었기 때문에 조선에는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때문에 세종 때에 조선의 실정에 맞추어 지리적 원근을 참조한 결과 2,000리 유배형은 약 600리, 2,500리 유배형은 750리, 3,000리 유배형은 900리 밖으로 등급을 조정하였다.
유배지는 유배인이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배정했다.
국왕의 윤허를 받아 유배지가 결정되면 압속관이 배정되었는데 이 때도 유배인이 관직자인지 여부와 관직 고하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즉 관직자는 의금부에서 관할하여 제2품 판서 이상의 대신(대감에 해당)들은 의금부도사, 정3품 당상관(영감에 해당)까지는 의금부 서리, 정3품 당하관 이하 관직자들은 의금부 나장이 압송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1618년 1월 63세의 나이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압송관은 의금부도사 이승의<李崇義>가 배정되었는데 그가 우의정 및 영주추부사를 역임한 원로대신이었기 때문에 의금부도사가 배정된 것이다.
그는 청파에서 출발하여 성남로를 거쳐 유배길 길목에 있던 포천의 선산<先山>에 들려 성묘를 하고 본격적인 유배길에 올랐다.
철령을 넘으면서 읊은 임금을 사모하는 시는 세인의 입에 회자가 되기도 했다.
서울에서 북청은 1,000리 길이었으며 ‘의금부노정기’에 의하면 12월 내에 도달해야 하는 거리였기 때문에 하루 평균 34.5리 씩 길을 가서 29일 만에 도착하여 규정보다 17일이 더 소요되었다.
뿐만 아니라 도중에 길을 가지 않고 머문 날도 7일 정도 되었다.

행차가 이르는 지역마다 수령이 미리 접경지역에 마중 나와 후하게 대접 했고 고을 사람들이 그 행차를 보기 위해 몰려나와 거리를 가득 메워 성시를 이루었다.
또한 저녁에 숙소에 들면 해당 지역의 수령이나 지역 사족등리 와서 인사하고 접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유배길에서 자비를 사용한 기록은 단 한 번 등장하는데 1월 22일 고원<高原>에 도착했는데 군수가 술에 취해 일찍 관아 문을 닫고 돌보지 않으므로 행전<行錢>을 털어 땔 나무를 구입했지만 혹독한 추위로 최악의 밤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그는 29일 간의 유배길에서 그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날들을 모두 해당 지역의 수령이나 역촌에서 후한 접대를 받았던 것이다.
유배지 북청에서도 배소로 정해진 집을 미리 수리하여 살림도구와 여러 기물들을 완비하고 노비들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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