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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데 고통과 슬픔
2021년 05월 14일 (금) 11:20:05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사서삼경 혹은 사서오경으로 대변되는 유교의 경전은 성현들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참다운 삶의 행로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경전은 단순한 해석이나 의미 분석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삶의 경험에서 그 의미를 공감할 때 비로소 그 구절의 뜻을 이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논어라는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군자는 먹는데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한 구절을 읽고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아마도 감동이었으리라.
 
너무나 고민스러웠던 당시의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아닐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날 이후 머릿속에서 먹는 문제가 사라졌다.
 
그리고 정신적 안정을 찾은 이후로의 훈련은 참으로 여유로웠다.
 
평소 너무나 쉽게 지나쳤던 한 구절의 경전 말씀이 당시의 심각했던 삶의 고민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 온 순간이었다.
 
이처럼 한 마디의 경전 구절이 인생의 행로에 깊은 영향을 주듯 세상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어려워하고 힘들어 할 때 힘과 용기를 주는 구절이 있다.
 
맹자의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주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 몸과 피부를 굶주리게 하여 그 하는 바를 어지럽히니 이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더해 주고자 해서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살을 에일 듯 다가오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고통을 딛고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아내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우뚝 선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조선조 명신 명재 윤증(1629~1714)이다.
 
명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7세기 말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36세(1664)에 학행<學行>으로 내시교관에 발탁된 이후 공조좌랑, 세자시강, 원진선, 사헌부, 대사헌, 의정부참찬, 이조판서, 의정부, 우의정 등 수 많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끝내 백의정승으로 평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직의 고관대직을 제쳐두고 소론의 영수로 추대될 만큼 사회적 역량이 지대하였고 세상을 떠났을 때는 임금인 숙종이 “유림의 그 도덕을 존승하니 소자<小子> 또한 일찍이 그를 흠모하였다. 평생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기에 만년에 한이 더욱 깊도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삶의 이면에는 영욕의 세월을 참아내는 세 가지 통한의 아픔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아픔은 어머니의 순절이었다.
 
명재가 8살이 되던 해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자 아버지 윤선거<尹宣擧>(1610~1669)는 가족들을 데리고 강화로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정축년(1637) 정월 스무 이튿날 청나라 군사는 강을 건너 강화도로 함락하고 말았다.
 
이때 성문을 지키는 친한 벗들과 함께 대처방안을 상의하던 아버지는 어머니 공주 이 씨 부름을 받았다.
 
부인 이 씨는 남편에게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한 번 뵙고 이별할까 합니다”하며 생의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이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결하는 장면을 차마 보지 못해 벗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어머니는 이튿날 아이들을 계집 종에게 맡기고 후사를 당부한 뒤 스스로 목을 메어 자결하였다.
 
이날이 정축년 정월 스무 사흗날 명재 윤종의 나이9세가 되던 해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순절은 그의 마음을 분발시킨 사건이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상주가 된 명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여 거처하던 집 한 편에 묻고 사방에 여덟 개의 돌을 놓고 가운데는 숯가루를 뿌려서 표시를 삼은 뒤 후일 천장<遷葬>을 위한 표시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 척화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영동 땅에 유배된 할아버지 윤황을 따라 가게 되었다.
 
어머니 빈소 곁을 지키지 못하게 된 어린 명재는 이를 애통히 여겨 아침, 저녁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어른 곁에서는 자기감정을 나타내어 어른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어린 손자를 타일렀다.
 
이에 명재는 초하루 보름에만 소리 내어 울고 아침, 저녁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이 되어 소상이 지났는데도 나물만으로 식사를 하였다.
 
어른들이 어린 명재의 건강을 염려하여 육식을 권하였지만 명재는 삼년간 육식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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