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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정여창 선생과 남계서원
2021년 04월 09일 (금) 11:34:21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일두 정여창(1450~1504)은 스스로를 한 마리 좀 벌레<一蠹>에 비유하며 겸양해 했던 조선 성종 때의 도학자이다.

 
22세에 경기도 이천에 있던 이관의<李寬義>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의 기초를 배우고 23세부터 점필제 김종직의 임직을 따라 함양에서 때로는 서울에서 그리고 밀양에서 수학하여 스스로 부족하다며 지리산 악양으로 들어가 성리학에 침잠 했던 일두 동문인 한훤당 김굉필과 도우로서 우정을 맺고 서로를 그리워하여 김굉필은 수동에 청계정사를 지어 정여창을 만나고 때로는 현풍과 함양의 중간 지점인 거창 가조 수승대에서 만나 강마하고 짧은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교분을 나누었다.
 
그 일두 선생의 위패가 남계서원에 봉안 돼 있다. 남계서원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조선 47개 사액 서원 중의 하나다.
 
이 지역 촌로들은 소수서원에 이은 전국 두 번째 사액서원이라는 점에 더 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더구나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정여창 선생의 탄생지라 경상도는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을 할 정도다.
 
길에서 본 서원은 어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엄숙한 느낌을 주었다.
 
홍살문 너머 풍영루의 빛바랜 색조, 엄숙하고 고고한 이 곳이 옛날의 빛나는 교육 기관이며 지금은 지방 문화재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지방문재이다.
 
홍살문 앞에서 말을 내려야 했던 하마비<下馬碑>가 엄연하게 세워져 있다.
 
비록 변한세태에 옛 권위가 일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인 구도는 옛 모습을 잃지 않았다.
 
홍살문 풍영루 강당 사우 일직선 선상에 두고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배치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히 우러러 보도록 만드는 위풍당당함을 갖추고 있다.
 
지형을 이용한 건물 배치와 함께 국가에서 인정한 건물 표시인 홍살문도 함부로 범접치 못 할 엄숙한 위세를 연출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조시대의 유물이 지니는 위엄이었다.
 
많은 방문객은 옷매를 가다듬고 마음을 약간 긴장시켰다.
 
홍살문을 통과하면 풍영루<風詠樓>를 만난다. 이 누각은 서원의 정문이다.
 
서원 누각은 본래 기능은 교육과 심신수련이 목적이다.
 
그러나 의려의 종교성과 관련될 때 엄숙함과 경건함을 더하게 된다.
 
풍영루는 일찍이 정여창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때 중건한 광풍루<光風樓>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어 선생과의 관련성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듯 했다.
 
풍영<風詠>의 말은 ‘논어’ 구절을 기억하게 한다.(이하 생략)
바라본 풍경은 대화 속의 흡사했다.
 
때 마침 내린 비로 푸른 남계수가 넘실대며 흘러가는 모습은 물의 발원지 회림동, 심진동의 색깔을 닮은 기수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넓은 남계 들판은 오곡이 풍성하고 남강 상류인 남계천이 유유히 흘러가고 남계서원 어디선가 학동들의 시경 읊는 소리가 들릴 듯 했다.
 
선생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쪽에는 강익 선생, 서쪽에는 정은 선생을 배향하였는데 두 분 다 일두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던 분들이다.
 
사당 앞에 있던 대야 받침대로 사용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둑이 들어 가져간 모양이다.
 
선생의 실천하는 삶의 하나, 하나가 후학에게 교육적 모범이 되었다.
 
성균관에서 유학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전염병이 돌아 아무도 마을에 들어가지 못할 때 선생은 전염병을 두려워 하지 않고 바로 어머니를 찾아 뵙고 간병을 하였다.
 
10여 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울면서 피를 토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정신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지극한 효행의 가르침을 실천한 본보기요 안음(지금의 안의) 현감 재임 시 조세와 부역을 줄이고 관원(관리)이 함부로 백성들을 수탈하지 못하도록 한 일, 법을 집행함에 교화를 위주로 집행한 일, 예컨대 당시 서상 노루목에 살던 박돌이란 죄인이 탈옥을 하여 관속들이 그 아비를 잡아왔을 때 일두 선생은 악한 자식을 둔 죄로 아비를 욕보일 수는 없다.
 
아비를 돌려보내고 아들을 잡아 오라고 했다. 며칠 뒤 아들이 제 발로 관아를 찾아왔다.
 
“제 아버지를 욕보이지 않고 풀어 주셨다기에 감복하여 자수를 하러 왔습니다. 제 죄가 크오니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오냐. 내가 널 용서 하겠다. 너는 이미 개과천선을 하였으니 착한 백성이 되었다. 이후 부모를 더욱 잘 모셔라”하고 놓아 준 일, 그리고 억울함을 호소하러 관아에 오는 백성들에게 관아를 개방하고 봄, 가을로 노인을 위해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여 안에서는 부인이 접대하고 밖에서는 선생이 영접하여 노인들이 흥겹게 배불리 먹도록 하였으니 이는 의리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보여 도학정치를 실천한 본보기다.
 
정시를 보는 틈틈이 안의 향고에 나아가 학동들의 재능과 수준에 맞게 교육을 하며 학생들의 성취가 적지 않았고 종성에 유배를 가서도 그 지역의 인재를 가르쳐 항상 마음에 잠재된 선함을 계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모범이었다.
 
이러한 선생의 행동은 이<理>가 있는 곳에 기<氣>가 있고 기<氣>가 움직이는 곳에 이<理>가 나타남으로 이와 기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란 우주관에서 기인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별개가 아니라 합일이란 인간관을 가지고 인간중심의 삶을 추구한 결과였던 것이다.
선생이 화를 당하고 후학들이 그를 기억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우의정으로 추증하고 문헌<文獻>이란 시호를 내리고 동방 오현의 한 분으로 향고에 종사토록 한 것은 사림 정치에 모범을 보인 선생의 삶에 감동되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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