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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면 이야기- ②
- 구만면 최시혁
2021년 01월 29일 (금) 11:40:10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두 번째 구만의 이야기는, 1919년 3월20일 고성 최초로 3.1독립만세 운동을 했던, 구만면 국천사장의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정신이다.

최낙종 선생은 구만면 화림리 112번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최정철 선생과 같이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국장(國葬)에 참여하였다가, 마침 탑골공원에서 3.1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몰래 지닌 채 구만으로 내려온다.

선생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최석호, 이정수, 문태룡, 우태선, 김해제, 구남서 등의 유림지사(儒林志士)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 의거를 하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를 구만면 14동네에 돌리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1919.3.20 오후1시경, 당산마을 독뫼산에서 나팔 소리가 나면, 일제히 국천사변으로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계획을 세워, 국천사장에서의 3.1 대한 독립만세 운동의 역사를 실행하게 된 것이다.

최정원 선생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하고, 허재기 선생은 공약3장을 지킬 것을 천명(天命)하자, 최낙종 선생이 앞장을 섰다.
군중은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인파는 십리길 배둔장을 향해 시위를 하게 된다.
회화면 군중과 합세한 1천여 명의 시위대는 일본 헌병과 경찰들이 총, 칼을 들이대며 만세 소리를 멈추라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성공적인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마친다.

최낙종 선생은 허재기, 최정원 선생과 함께 한국인으로써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협력하지 말고 다니는 직장에서 퇴사하자는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군내와 전국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최낙종 선생은 피신해 서울로 향한다.
이듬해 29세에 조선일보 기자로 함흥에서 활약하다가, 큰 뜻을 품기 위해 적의 심장부인 도쿄로 가기로 하였다.

선생은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류를 하면서 은둔(隱遁) 생활을 한다.
1920년 중반 막내 동생(최낙봉)의 도움으로 한글 인쇄소인 삼문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다. 벌어들인 돈은 조선 유학생과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내놨다.
1925.26년, 그 후에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차례 옥고를 치루었으나, 우국애족(憂國愛族)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광복(光復)을 그렇게도 갈망(渴望)했던 선생은, 광복 2개월을 앞둔 1945년 6월 8일 오후 2시, 후쿠시마에서 결국 운명(運命)하고 말았다.

한학을 공부한 최낙종 선생은,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삼문사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필(筆-글)로써 대한 제국의 정신을 고양(高揚)시키고, 백성의 자유인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구만천은 이렇듯, 가슴 졸이며 마음껏 외쳐야 했던 숭고(崇高)한 역사적 사실을 안고 있다. 

구만에 살고 있는 내가 이 사실을 2018년에 알았다니,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다행한 것은, 군수께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지(感知)하고. 국천사변을 고성군 3.1 독립만세운동의 발원지(發源地)라고 조촐하게 꾸며 놓았다. 
그리고 담티고개에서 배둔 사거리까지 구만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독립만세 국천길’로 명명한 것이다.
이곳은 고성의 의로운 땅 충절의 고을 구만면.
고성에서 처음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 이웃 배둔 장터로 가서 “대한독립만세” 드높이 드높이 소리쳤노라.
구만천은 오늘도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의 함성을 품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세 번째 구만 이야기는, 현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구만에는 경남에서도 유일한 서당(書堂)이 있다. 구만에 살고 있으면서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단법인 이회서당(以會書堂)이다. 
구만면 영회로 1773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매월 둘째, 넷째주 금요일 10-12시 두 시간 공부를 하고 있다.
학우들은 70-80대가 대부분이고, 60대 몇 명 중, 내가 막내다.
 
이 이회서당은 허격(許格) 신암(新庵)선생께서, 태어난 구만면 신계마을 자택에서 후학(後學)을 지도하시던 곳인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더 전하고자 지금 이곳으로 공부 마당을 옮긴 것이다.
신암(新庵) 선생께서는 1910년 태어나시어 1991년 82세에 타계(他界)하셨다.
36년 동안 일본 식민지의 혼란 속에서 스스로 수학(修學)하시어, 1946년 교육받지 못한 청소년이 안타까워, 신계의 사랑에 이회서실(以會書室)을 개설하게 된 것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문생(門生)들이 약 600여 명에 이르고, 선생님의 큰 아들 허창무 박사(한국정신문화 연구원)와 몇 명 문생들이 주축이 되어, 2010년 이회서당을 법인화 하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신암 선생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孝(효)와 學(배움)이었다.
선생께서 작사한 학사 첫 구절에 보인다.

學兮學兮將何學(배우라 배우리라 어떻게 배우리오).
幼學長學老亦學(어려서나 젊어서나 늙어서도 배우리라)

이회서당을 들어서면 서당 우측 학사(學詞)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배움을 통해서 벗을 알고 이웃을 알게 되어, 사회의 일꾼이 되고 봉사하는 이문회우(以文會友)사상이, 신암 선생의 건학이념(建學理念)이자 學(배움)의 목표였다.

인간이 배워야 한다는 명제(命題)는, 논어(論語) 학이편 1장에도 실려 있다.
子曰 - 學而時習之 不亦說乎(공자가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유교 경전인 논어는, 공자 사상의 핵심인 仁(인)에 대하여 공자의 말씀과, 제자와 사람들과의 대화를 책으로 수록한 것이지만, 결국엔 學而時習之 -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유명한 석학들, 성공한 경영자들, 모두 논어를 숙독(熟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2,500년 전의 고전이 21세기 성공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고, 하버드대학 및 미국 대학의 20%가, 영국의 캠브리지, 옥스퍼드 등 세계의 유수한 대학들이 정규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논어의 가치를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작은 시골, 구만면의 이회서당에서 공자 왈, 맹자 왈, 수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구만면은 이렇게 선조들이 내린 구만의 정신, 구만의 맥을 잘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이회서당은 구만 정신 흐름의 중심에 있을 것이고, 나는 신암(新庵) 선생님의 이문회우(以文會友) 정신을 성실히 수행(修行)하리라 다짐해 본다.
 
또 하나 구만의 자존심이 있다. 구만교회이다.
구만교회는 2020년 올해로 11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성에서는 제일 먼저 설립된 예배당이다.
진주에서 호주출신, R.D.Watson(한국명:왕대선)선교사가, 선교를 위해 포근한 어머니 품 같은 구만에,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을 심은 것이다.
오늘도 구만교회 사랑의 메시지는, 이 작은 마을에 골골이 가득하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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