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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전래
2020년 07월 09일 (목) 18:09:58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고려 말 안향<安珦>(1243~1306) 주자서<朱子書>를 가지고 온 이후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과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대한 기록인 무이지<武夷志>도 각종 성리서들과 함께 이 땅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 선비들은 공자<孔子>가 주공<周公>을 음모했던 것처럼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어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과 무이구곡을 상상하고 동경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조 선비와 학자들의 의식은 자신이 은거하고 있는 향촌의 명구승지<名區勝地>를 주자의 무이구곡과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문학적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이 시기에 주자의 무이도가는 중요한 문화적 비평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토대로 다양한 구곡시가가 창작된 것이다.

16세기는 퇴계 이황(1501~1570)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 율곡 이이<李珥>(1536~1584) 등 조선 성리학 기틀을 다진 선비들이 많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그리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자의 무이도가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수용하고자 하였다.
하서 김인후와 같은 이들은 주자의 무이도가를 입도차제<入道次第> 조도시<造道詩>로 보았다.
퇴계는 평생 주자시를 매우 좋아하였다.

또한 퇴계는 일찍이 중국에서 유입된 무이지, 그리고 무이구곡을 상상하였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10수의 구곡시를 지었다.

퇴계 이후 조선조 영남 선비들은 남명과 퇴계가 지향했던 무이도가에 대한 시와 학통을 계승하여 수십편의 구곡시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주자의 무이도가 제9곡시에 대하여 어인<漁人>이 도원을 찾아가는 것처럼 마땅히 세외<世外>의 별건곤<別乾坤>을 다시 찾아야하며 이는 결국 일상의 현상 속에 존재하는 본체<本體> 즉 천리<天理>를 궁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주를 다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그가 창작한 제9곡시에는 모처<姆處>는 오히려 다른곳에 있다라고 하여 도달한 공간에 머물지 말고 또 다른 극처<極處>를 찾아야 한다.

퇴계의 9곡시 중 다음과 같이 일수<一首>만 기록한다.

이곡이라 선녀가 변화한 푸른 봉우리 <二曲仙娥化碧峰>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라 <天姸絶世靚修容>
다시는 경국지색 엿보지 않노라니 <不應更妛傾城薦>
오두막엔 구름이 깊고 깊게 드리우네 <閭闔雲深一萬重>(퇴계 문집 중에서)

퇴계 이후 영남 선비들은 퇴계가 지향했던 무이도가에 대한 시 인식을 계승하여 구곡시를 창작하기로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작푸므로는 18세기 퇴계학맥의 계승자였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칠곡시<七曲詩>를 들 수 있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의 계승자였다.

자신이 은거하던 고산<高山>을 대상으로 구곡이 아닌 칠곡을 경영하면서 무이도가의 형식을 일부 변형하여 칠곡시를 창작하였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유람의 끝인 칠곡에 다다랐으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호중<壺中>의 별유천<別有天>으로 상징되는 극처를 다시 찾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퇴계의 구곡시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지향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퇴계 이후 영남 선비들의 구곡시 창작의 정형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조선조 선비들에 주자의 존중의 대상이었다.

그가 남긴 시문<詩文>과 삶의 족적들은 그에게 반드시 본받아야 할 가치로 인신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주자가 살았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전환되었으며, 그러한 의식이 조선조 구곡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주자의 학문이나 문학을 이식하는 수준의 구고문화를 구축했던 것은 아니었다.
주자가 만들어낸 구곡문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탄생시켜 조선의 구곡문화를 완해서 나갔던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이룩했던 이러한 구곡문화는 구한말 이후까지도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문화적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따라서 구곡문화에 대한 좀 더 많은 관심이 그들이 향유했던 다양한 문화적 산물에 대한 관심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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