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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망우당 곽재우<忘憂堂郭再祐>
2019년 10월 18일 (금) 11:42:05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일본의 대포항을 출발하여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적들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아비규환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평화로운 세월을 보낸 조선조에서는 병사들까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상황이다.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왜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이 진입한지 한 달 만에 서울이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우리 관군은 아무런 방비 없이 당하기만 하였다.

곽재우(1552-1617)는 경상도 의령의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공<忠翼公> 본관은 현풍<玄風>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셋재 아들이다. 남명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1585년(선조18)에 34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글 명문이였나 이 글귀 중에 선조임금의 거스르는 글귀가 있어 파방<罷榜> 당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앞으로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낙동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었다.

이 때 임금은 북쪽으로 피난가고 백성들은 풍전등화처럼 집을 버리고 산중으로 피난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곽재우는 분개하여 가산을 털어 의령고을의 장시들을 모집하여 의병의 한 부대를 조직하니 도망간 관군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2천명에 이르렀다. 연려실기술을 읽어보면 곽재우는 전쟁을 할 때 항상 붉은 배로 만든 군복을 입고 스스로가 천강장군이라 일컬었다. 세상에서 홍의장군이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곽재우가 사는 마을 앞에는 현고수<懸鼓樹>라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 아래서 의병들의 군사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 493호로 지정된 이 나무 옆에는 노산 이은상이 지은 망우당곽재우유허비가 서 있다. 느티나무의 현황을 살펴보며 우람하게 뻗은 가지에 북을 매달아 치면서 의병들을 규합하였다. 이 나무를 보고 곽재우의 용력을 떠올려 쉽게 다른 나무처럼 대하기가 매우 어렵다. 해마다 의령군에서 개최하는 의병제전 때 이 나무 아래에서 성화가 채화 된다고 하니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령군민의 외로움이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망우당 곽재우가 첫 번째 의병을 이렇게 왜적과 전쟁한 곳은 기강나루였다. 지금의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의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일명 거름강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기강나루의 근처에서 살았음으로 이곳의 지형은 누구보다도 곽재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적이 지나가도록 기다렸다가 공격하여 왜적의 일개 부대를 전멸 시킨 것이다. 오늘날 이 강가에는 곽재우 장군을 기리는 불망비<不忘碑>를 건립하여 혀재에 보존되고 있다.

망우당 곽재우는 낙동강 방어선과 진주성을 잘 지켜냄으로써 왜군이 호남진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곡창지역인 호남이 보유하고 있는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수송 보급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여 어려움 없이 낙동강까지 진입한 왜군은 호남으로 진출하여 군량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닷길이 이순신으로 인하여 막히자 육로를 통해 호남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정암진에서 곽재우에게 패함으로써 호남으로 향하려는 길목을 차단하였다.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는 용감한 장수 수십 명을 뽑아 자신과 같이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타게 하여 신출귀몰하기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왜군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그 틈을 타 숨어서 깃발을 흔들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산골짜기를 진동시키니 왜군들은 아군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어 더욱 놀라고 의심하여 신<神>과 같다고 하면서 전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복병들을 활로 사격하여 많은 왜군을 죽였다. 결국 왜군들은 남강<南江>에 접근했으나 끝내 정암진을 건너지 못했다.

오늘날 정암진 언덕 위에는 정암루<鼎巖樓>가 서 있다. 그리고 의령읍 내의 남산에는 곽재우가 그 휘하 열일곱 의병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건립되어 있으며 정암루에서 충의사로 가는 길의 이름도 의병로라 하여 곽재우의 절의를 기리고 있다. 망우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많은 재산과 십여 명의 노비를 거느린 시골 부자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그 많은 재산을 의병 모집과 무기 구입비로 전부 투자하고 노비는 의병으로 출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끼니를 이을 식량이 없어 폐양립(요즘 모자와 같은 물품)을 만들어서 이를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유지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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