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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와 같은 약자 배려
2019년 10월 11일 (금) 13:44:30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살기를 기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지렁이나 사람이나 한가지라오. 저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흙탕물을 마시니 일찍이 나와 다를 바가 없고 나의 우연한 병으로 인하여 저 허다한 생명을 죽인 다음 불로 익히고 녹여서 탕으로 만들어 가지고 복용하여 즉시 효험이 있다면 효험을 얻는 사람은 다행이겠지만 효험을 나게 한 지렁이로서는 너무나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늘 말하기를 불가<佛家>에서 평생 초식을 하고 하나의 생물도 해치지 않는 것은 비록 우리 유학에서의 치우치지 않고 성인의 법을 이어서 동감하게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옛날 채제공은 자신의 병을 위해 다른 존재를 죽음에 내몰 수는 없다고 여겼다.

조선조 때 선비들이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주자<朱子>는 “추위와 더위를 알고 굶주리고 배부른 것을 인식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는 것은 싫어하는 것, 이익을 따르고 위험을 피하는 것 등은 사람과 만물이 한 가지다”라고 말 한 바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채제공은 기억하고 있었다.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이 함께 길러져서 서로 해치지 않는다”라는 구절도 떠올렸을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실려 있는 고기를 먹는 문제 역시 채제공의 깨달음에 영향을 준 글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요 동물은 나의 동류<同類>다. 그러나 초목은 지각이 없으니 피와 살이 있는 동물과 구분이 있어 취하여 먹고 살아도 좋다. 동물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중요한 이유는 사람과 그 정이 한 가지다. 또 어찌 차마 상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나아가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그 형태로 보아 잡아 죽이는 것이 마땅하고 사람에게 사육이 되는 동물은 곧 나를 통하여 성장을 하므로 그래도 생명을 맡길 수 있겠지만 산중이나 물속에 절로 나서 절로 살아가는 동물조차 모두 사냥꾼과 어부의 독수를 입고 있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가 어떤 사람이 동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겨났으므로 사람에게 잡아먹힌다”라고 했다.

정자<程子>가 이 말을 듣고 “이가 사람을 무는데 사람은 이를 위하여 태어났는가”라고 물으니 “변론한 것이 모두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저 벌레가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더니 “새가 벌레를 잡아먹고 살이 찌면 사람이 그 새를 잡아먹게 된다. 그러니 저것은 곧 사람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 말 또한 궤변이다. 매번 불가에서의 자비 한 가지 일을 생각해보니 아마도 타당할 듯 하다.
17세기 무렵 동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서양의 학설이 조선에 들어왔다. 생태에서 제일 위에 있는 것이 사람이므로 사람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하다는 인간중심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과 동물의 생존이 동일하다”고 하였고 “세상사를 두류 겪고 나서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보니 터럭만큼이라도 자기가 나아가는 데 이익이 될 것 같으면 곧바로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죽이더라도 난색을 표하지 않고 도리어 뜻대로 되었다고 여기는 자들이 넘쳐나니 모두가 다 이러하오. 그러나 이러한 무리들은 이익만 알았지 의리를 모르는 자라오. 미래에 자기보다 지혜와 힘이 더 나은 가 있어 자신을 죽여 그가 지금 한 것처럼 하려 든다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법이니 그 화가 무궁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또한 슬프지 않겠소. 지금 지렁이를 탕으로 만드는 처방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어 같지 않음이 있을지라도 남을 해쳐 나를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오”

하늘의 이치는 사물에게 널리 베풀어 비와 이슬로서 성장하게 하였으며 성인과 군자는 백성을 사랑하여 인과 의를 함께하여 공존 공생 하였고, 때문에 태산과 고산 언덕에서 나는 개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와 함께 자라고 현달한 집안에서는 똑똑하든 못났든 함께 살고 있으며 복숭아나무와 개가죽나무는 기이하고 범상한 차이가 있지만 천지 기운을 함께 받아 자라나고 있으며 이는 천지 순환의 이치이다. 여기에 사람이 개재되었다면 개가죽나무를 버렸을 것이다. 동산에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 사이에 행과 불행이 존재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성현의 명언이자 교훈이다.

조선조 정조 때 남공철 정승은 “자기의 동산에 있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행과 불행이 차등이 있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찮은 미물을 보고서도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약육강식의 논리를 비판하였으며 약자와의 공생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격물과 성찰의 공부가 21세기의 새로운 화두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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