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에는 백구룡선생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단다”하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봉근아, 등산이란 올라 올 땐 힘들었지만,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고 자연과 우주기상은 참으로 넓고 무한하다는 것,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어 참 좋단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인자(仁者)는 요산(樂山)이요.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하면서 마음을 수양했단다.”라고 덧붙여 말해주었습니다.

 ▶ 도학자 백구룡(白龜龍) 선생에 관한 전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정기가 서리는 곳으로 위인이 많이 난다하여 동방의 승지로 일컬어왔습니다.
 구룡선생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숙종 임금 말년인 1717년 가리동(佳里洞)에서 수화(受和)와 경주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깨끗하며 총명하기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주역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으며 평생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한 선비였습니다. 구룡 백봉래(九龍 白鳳來)선생은 주로 주역 쾌, 사서의 이치를 그림으로 풀이한 내용이 많은 학문가로 문리가 통하지 않은 사람들은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도학의 심오한 경지에 오른 학자로 알려집니다.

거류산 정상 표지석

 7세 때 부친을 따라 지리산 삼신봉 자락 법성암(法聖庵)에 가서 사략(史略)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자 벽을 마주 보고 깊이 생각하다가 새벽닭이 울 무렵 비로소 이해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7살 먹은 아이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스님들이 경이롭게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때부터 송정(松亭) 허간(許侃)선생을 찾아서 학문을 배워 사략 통감 등의 역사서를 모두 읽고 경서 해독을 막힘없이 해 멀리까지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 때 나이 11세였다 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당시 군수가 시제를 내어 재주를 시험해 보고 ‘신동’이라고까지 했습니다.

 15세 때부터는 집이 가난하여 늙은 부모를 모시고 몸소 밭을 갈면서 주경야독을 해야만 했습니다. 매번 밭을 갈면서 밭고랑의 길고 짧은 것을 계산하여 일정한 양의 책을 외웠습니다. 하루는 ‘맹자’를 외우면서 밭을 가는데 글 외우는데 심취하여 소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쟁기가 땅속 깊숙이 들어가 절단된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주경야독 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부친은 아들이 농사일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학문을 게을리 한다고 자주 나무랐다. 구룡선생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농사를 그만두고 책을 짊어지고 와룡사(臥龍寺)로 들어갔습니다.

 와룡사에서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읽어 무릎 뼈가 손상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루 저녁에는 갈증이 심하여 물을 마실 생각으로 스님들이 잠자는 틈을 이용해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의지해 부엌으로 가는데 그만 넘어져 기력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글을 외우자 스님들이 놀라서 구룡재를 업어 자리로 인도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그런 방법으로 8년 동안 산사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산천이 모두 다 글이요, 초목이 모두 경서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백구룡 선생이 24세 무렵 이미 경학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인근에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거류산 아래 정자를 건립하고 편액을 걸면서 구룡재(九龍齋)라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백구룡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백구룡선생은『경(敬)을 본으로, 근(勤)을 행(行)』으로 삼아 지성으로 강론하셨다 합니다.
 백구룡 선생은 부귀영달에 뜻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백구룡 선생이 서울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고성군수를 역임하고 도승지 등을 거쳐 이조 판서로 있던 이익보(李益輔)라는 사람이 백구룡 선생의 경학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백구룡 선생은 이를 사양하면서 “제가 사는 곳은 거류산이 폭포로 장관을 이루고 강호의 백구들이 오는 때를 서로 약속합니다.”라고 하니 이익보가 참으로 어진 선비라고 칭찬해 마지않았습니다.

 30세 이후로는 자연을 벗 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과 만나 마음속 회포를 풀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백구룡 선생이 살던 곳은 거류산 아래 가려리 덕촌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유인 섬멸시킨 당항포대첩의 끝자락 속시개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따뜻한 봄날과 쾌청한 가을에는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꽃과 쑥을 휘날리며 배를 띄워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조리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백구룡 선생은 연세가 80살이 되어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 피로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면 “옛사람들도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거늘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즐겁지 않겠는가” 하고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귀가 어둡다고 비방하여도 귓가가 고요하고
눈이 어둡다고 시비를 하나 눈 밑에는 아무것도 없네.
높은 베개를 벗 삼아 누워 있으니 산속에 있는 집은
밝은 달이 비추고 이 사이에 한가한 자 나로구나.

 이 시는 백구룡 선생의 유유자적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1799년 정월 스무여드렛날 해시에 구룡재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조정에서는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했습니다.

 또 다른 전설로는,
 ▶ 축지법으로 산삼 캐려 금강산에 갔다 온 전설
 백구룡 선생이 오두막집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연로하신 모친을 모시고 있던 중 노모가 병환이 들어 위독하자 달밤에 동생을 데리고 산삼을 캐러갔습니다.
 동생에게 동생은 내가 딛는 발자국만 밟으라고 일러놓고 한참을 가니 어느 산 바위 밑에 도착하자 산삼이 수백 포기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구룡 선생은 그 중 제일 야윈 산삼 3포기만 뽑아 달려 노모에게 드렸더니 다음날, 노모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동생이 저녁에 가본 산과 바위를 안 터라 거기 가서 그 많은 산삼을 캐어 팔면 큰 부자가 될 것 같아 아침 일찍 거류산에 가서 전날 갔던 바위와 산삼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매었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집에 돌아오니 선생이 이미 동생의 마음을 다 알고 동생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동생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동생이 그냥 볼일이 있어 어딘가에 갔다가 온다고 변명했으나, 선생은 동생을 꾸짖기를 “어제 밤에 갔다가 온 산은 거류산이 아니고 금강산이었다. 내가 축지법을 써서 갔다 왔는데 부질없이 헛고생했구나. 사람은 물욕이 너무 많으면 못쓰는 법. 제복대로 살아야지.”하고 말하니 동생은 크게 깨닫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심히 살았다 합니다.

 ▶ 하룻밤에 전국 논밭의 곡식 낱알을 모아 딸을 일깨운 전설
 한편, 선생에게는 나이든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딸이 선생에게 불만조로 아버지는 그런 좋은 재주를 가지고 계시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못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구룡 선생은 딸에게 “부자가 그렇게 좋으냐. 그럼 내가 부자가 되어보지.”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딸이 깨어보니, 집 안마당에 큰 두지(곡식을 담을 수 있는 섬모양의 기구) 2개가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백구룡 선생께서 딸을 불러 앉히고는 “이 곡식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낱알들을 전부 주워 모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만 먹게 되면 곡식을 주워 먹고 사는 새가 전부 굶어죽게 된다. 그러니 도로 제자리에 돌려보내야 한다. 욕심만 부리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법. 남에게 피해를 주면 재물은 많을지 몰라도 마음이 편치 않는 법이다.
 마음이 편치 못하면 행복해질 수 없는 법.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고사는 것이 행복이니 그리 알아라.”하고 설득시킨 뒤 다음날 곡식을 전부 제자리로 도로 흩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올라가 선생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한 평생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합니다.

구룡재(九龍齋) 전경

 이런 산의 전망과 전설을 이야기하고 나니, 학과 같이 소나무같이 도학자 선비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그분이 덕행이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산에 대한 친밀감을 더욱 강하게 다가와 형언키 어려운 호연한 산기가 활력소가 되어 원기가 되어 샘솟았습니다.
 14:00경에 온 길로 하산하는 것보다도 산을 종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의 정맥, 철사다리가 높고 길게 설치된 관봉(冠峯 일명: 君子峯)과 등잔봉(燈盞峯)을 타넘었습니다. “아빠, 이 길이 등산 길 맞긴 맞아요?”하고 아들이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길이 벼랑길로 굴곡이 심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으슥한 숲길이었기에 그랬습니다. 지금은 잘 다듬어진 등산로이지만..
 관봉 나란히 이어진 등잔봉을 차례로 등정한 뒤 약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참을 걸어 감동마을을 거쳐 동광초등학교 앞 상점에 도착 음료수와 막걸리 한 잔으로 산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 돌아오는 버스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20세기의 마지막 해로서, 새 천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국조이신 단군왕검께서 우리나라를 세운 뜻 깊은 날에 아들과 단둘이서 산행한 우리 고장의 명산인 거류산은 매우 값지고 귀중한 것이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 고장 고성군의 아름다운 모습을 체감하며, 아들과 함께 거류산이 지닌 역사와 선인들의 삶의 흔적을 알아보게 되어 보람되고 즐거운 하루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아, 오늘 힘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류산의 진정한 주인은 산과 자연이 좋아 찾아가는 우리가 아니겠니. 뿐만 아니라 산은 언제나 변함없이 산의 품을 찾아 아끼며, 보호하고, 사랑하고 있단다. 산이 제공하는 값으로 다질 수 없이, 무한정으로 제공하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경치에 감흥하여 즐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산주인 인것이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1999년 10월 3일 늦은 밤에 은하수를 바라보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