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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임금과 서학 수용
2022년 05월 20일 (금) 13:30:03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에 서학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여기에는 대내외적인 배경이 있었다.
 
대내외적 배경은 성리학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 심성론 의주의 성리학이 사상계를 지배하면서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서학에서 그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대외적 배경은 조선과 청과의 관계 안정이었다.
 
양국 관계가 안정되자 청에서 서양나라의 선교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 졌으며 그에 따라 서학 유입 또한 활발해 진 것이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 이르자 지식인들 사회에서 서학은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하였다.
 
귀한 집안의 벽은 온통 서양화풍의 그림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벽에 서양 지도를 걸어놓고 감상하는 것도 지식인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정약용은 천문, 역상, 농정, 수리에 관한 기구를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며 정조대의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정약용의 지적이 결코 과장 된 것은 아니었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경우 서학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였다.
 
정부나 지식인들에 의해 중국에서 서학서가 계속 수입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이들 서학서를 필사하거나 활자화 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서학서는 점차 널리 보급되어 다량의 서학서를 보유한 지식인들이 등장하였다.
 
홍대용은 율력연원, 역성고성 상하편, 역상고성 후편 남희인의 곤여전도, 태서건곤여지도 등에 이르기까지 소장하지 않은 서학서가 없었다 할 정도로 다양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서명응, 서호수 부자도 방대한 서학서를 소장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평생 서양 역사학에 전념하고 수리정온과 역상고성을 검토하였다는 정철조 역시 방 안 가득 서양 서적을 모아 놓았다고 이야기 되던 대표적인 소장가였다.
 
최신 서학서를 소장한 사람들은 중심으로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이면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학열기의 중심부에는 이덕무가 서울의 서학수리 전문가라고 지목했던 서명응 부자, 이벽 세계지도 전문가 정후조 등이 위치해 있었다.
 
이외에 문광도, 황윤석, 정철조, 이가환, 이자경, 홍양해, 정동유, 정동기, 유의양, 유정양 등도 서학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지식인들이었다.
 
서명응, 서호수 부자 간 정철조, 정후조와 유이양, 유정양이 형제 간 정동유, 정동기가 종형제 간이었던 데서 볼 수 있듯 서양 과학 기술 연구는 대게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점차 횡적인 교류도 발달해 지는 양상을 띄고 있었다.
 
횡적인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이벽을 중심으로 1783년 전후하여 서양 수학을 연구하는 주어사 강학회 같은 모임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물론 처눚교 서적도 유포되면서 강학 모임이 만들어지고 신자들도 늘어났다.
 
지방의 상황은 서울과는 차이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최신 서학서 같은 것은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서적을 보기 위해서는 서울에 올라와야 했다.
 
서울에 올라와 서명응 집안을 방문했던 황윤석은 서호수가 지방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던 다양한 서학서를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 이미 섭렵한 것을 보고 사람은 역시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고 자신의 심정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지방에서 서학서를 전혀 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각 지방사회에도 다양한 서학서가 유포되어 있어 구해볼 수 있었다.
 
황윤석의 경우에도 지방에서 적지 않은 종류의 서학서를 접하였음을 확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18세기 후반은 서학의 유행기였다.
 
정조는 서학 수용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변화가 모색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전통적인 식을 고수하려는 움직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세계를 중화와 이적으로 구분하여 중화 문물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전통적 인식을 고수하던 이들에게 당시의 상황은 총명한 자들은 천문학에 빠져 있고 어리석은 자들은 천주학에 끌려 다니는 암울한 시기로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상반된 두 힘이 맞서던 시기에 누구보다 고민이 큰 사람은 두 힘 사이에 파상되는 갈등을 조정해 가며 발전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국왕 정조였다.
 
정조는 정학<正學>을 중심으로 시공을 아우르는 학풍을 진작하여 국가를 경영하고자 하였다.
 
이는 정신적인 부분과 경제적인 부분을 분리하여 정신적 지주로서 주자학의 가치는 인정하되 주자학에 부족한 경제적인 부분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북학은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는것이었다.
 
정조 임금은 물품은 사용하는데 편리한가가 아주 중요하지 그것이 중화의 것이냐, 오랑캐 것이냐는 따질 필요가 없다는 북학적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서학 수용 문제에서 정조의 전략은 서양의 정신적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천주교는 배척하되 과학기술은 수용한다는 정책으로 표출되었다.
 
정조는 천주교의 서적의 유입은 철저히 금지시키는 반면 서기 관계 서적에 대해서는 수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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