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설치 해 놓은 독서용 큰 돋보기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편리하다.

 

어느 사람은 유서에서 ‘눈이 어두워 책도 볼 수 없다’라고 했지만, 늙으면 독서의 속도가 느릴 뿐이다.

 

나는 명의상으로 몇 문인협회에 소속이 되어 있어, 새로 발간되는 책들이 배달된다.

 

 

다른 책들은 겉봉도 떼지 않고 두지만, 고성문인협회 회원의 책은 유심히 읽는다.

 

책값은 못 줄 망정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겠기 때문이다.

 

봄꽃이 멍울을 터뜨릴 즈음 수필집 한 권이 배달되었다.

 

고성 문협의 원로 회원인 이명선 씨의 ‘아버지의 달, 집을 짓다’이다.

 

75세의 만추에 첫 작품집이다. 

 

필자 이명선씨는 나와는 같은 세대와 환경에서 살았기에, 나에게는 구구절절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당시에는 남녀유별을 제대로 지키며 살던 세대여서, 여자 아이를 30리나 떨어진 시골에서 읍내 중학교에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얼마나 개화되었던가를 알 수 있다.

 

필자의 인성은 가정 환경에서 형성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자서전도 같고 소설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들로 짜여져 있다.

 

특이한의태어 의성어 사투리들은 필자가 아니고서는 흉내낼 수 없다. 때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때론 미소 가득 읽었다. 

 

시적인 문장이요 소설 같은 내용 들이다.

 

짧고 명쾌한 문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글의 끝 자락에는 늘 의문표를 던져 독자의 상상을 자극했다.

 

나는 음악에 대한 소양이 좁다.

 

그래서 음악 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대체로 음악 용어는 외국말이어서 외우기도 어렵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넬라 판타지아’, ‘안단티노’, ‘알레그로’, ‘아첼레란도’, ‘비바치시모’ ‘체리핑크맘보’ 등 필자는 그 내용들을 잘 풀어 쓰고 있다.

 

당시에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걸인이 많았으며, 고아를 입양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집에도 아버지께서 내 또래의 머슴아를 데리고 왔으나 나를 괴롭혀 내 쫓고 말았다.

 

필자의 집에서도 비슷한 사례였던가 보다.

 

그러나 여성의 감성은 남성보다는 여리고 예쁜면이 엿보인다.

 

‘부티허리’ 글은 삼베 생산과정의 민속자료이다.

 

‘냇가의 가장자리에 돌과 흙으로 삼나무 길이 만큼의 흙솥이 만들어졌다’ 삼 재배에서 가공이며 ‘허벅지에 대고 비비어서 잇기 작업’ 양잿물 삼 타래 실꾸리 도투마리 들말 끄싱게 바디 시침대 베메기 재럽대 삼밭 두레삼 등의 낱말을 알랴!

 

어릴 때 삼밭에서 숨바꼭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산도 벌거숭이였고 숨바꼭질을 할 만한 장소가 흔하지 않았다.

 

키가 큰 삼밭에서 풋풋한 잎냄새를 맡으며 숨어 놀기도 좋았다.

 

지금은 대마초라고 해서 정부관리하에 제한 재배를 하지만, 예전에는 대마초의 마약 성분도 몰랐다. 

고방(庫房)이란?

 

세간이나 그 밖의 온갖 물건을 넣어 두는 방인데 젊은이들은 알까?

 

내가 어릴 때는 집집마다 고방이 있었다. 우리집에는 고방문이 없었지만, 일가 집에는 고방 문이 있었다.

 

그 고방문은 두 짝 나무 여닫이로 튼튼하게 만들었다.

 

손잡이가 있는 곳에는 이중으로 판자를 대어 잠금장치로 장석이 붙어 있어 보기도 좋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 문에 크레용으로 ‘고방’이라고 썼다.

 

그 글씨는 그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때까지 적혀 있었다.

 

‘반란’에서는 시골의 가정사와 무관심을 엿보게 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되도록 아들이 다니는 학교며 반조차 모르는 애비, 화투 놀음에 2만원 잃은 돈 때문에 집에서 화풀이하는 남편, 그래도 남자는 가장(家長)이었다.

 

쥐 소동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이다.

 

시골에서 한옥은 지금도 그렇지만, 도회의 아파트나 양옥에서 자란 청소년은 아마 쥐들의 만행을 모를 것이다.

 

곡식은 물론이요 작품에 소개된 천정의 활동, 이불장 속의 만행, 더 나아가 책을 찢어 못쓰게 만드는 것까지 당하고 보면 이루 말 할 수 없다. 

 

책의 겉면에 기록 되어 있는 에세이스트 배정인의 글을 인용한다.

 

「현대 과학 문명이 인간의 삶에 즐거움과 편함을 기여하고 있다면,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할 ‘인간성’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앗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략) ‘아버지의 달 집을 짓다’는 인간의 뿌리를 생각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아주 소박하게, 영원을 희구하는 인간 본연의 꿈인 아버지의 달은 지은이의 가슴안에 떠 있고 이 달은 삶을 영위하게 하는 땅심인 것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깨닫고 있다. 그것이 집을 짓는 행위이다. 또 ‘이 작가의 에세이는 글꽃이 꽃으로서 지녀야 한다는 여러 가지 기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소박한 이야기들을 소박한 마음으로 소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실로 어려운 일이 소박하게 함이다. 따라서 이 소박함의 순도야말로 우리가 논하는 순수성이라는 예술일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사람마다 자기가 짓고자 하는 집이 따로 있다.

 

세계 여행을 주제로 한 풍경을 보면 큰 대궐에서부터 초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집들을 보게 된다.

 

필자가 가슴속에 짓는 집의 구조를 청소년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만 창고 2개에 한 칸에는 미움 분노 아픔 온갖 잡동사니를 집어넣어 문을 단단히 잠가두고, 한 칸에는 사랑 자비 봉사 여유를 갈무리 할 수 있게 하여 늘 들랑거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둘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집이 있을까?

 

어릴 때 시골 친정집을 기초로 한 마음속의 집이다.

 

젊은이들은 대궐 같은 집을 원하지만, 생의 끝자락에 바라는 그리운 반주깨미 같은 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