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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선덕여왕 ①
2022년 01월 07일 (금) 10:34:34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은 전에 없었던 여성 국왕에 대한 질시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현대와는 다른 배경에서 등장했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성 왕으로서 국내외적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그녀를 사회 전 분야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 시점에서 주목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여왕 즉위 전야에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한강유역 확보를 위해 펼친 두 차례의 군사작전(551~553)을 통해 실력 이상으로 커버린 신라는 진평왕(직위 579~632)의 통치 후반기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체제를 재정비하고 백제도 무왕(재위 600~641) 대에 국력을 회복하고 복수전을 펴 왔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의 부친 진평왕은 53년간 재위하며 행정체제를 확충, 정비하고 자신의 왕실이 석가모니의 위대한 집안이라는 소위 진종설<眞種說>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하였다.
 
이 이념은 지금으로는 유지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왕실의 신성함을 보장해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고 왕비는 마야<摩耶> 부인이었는데 이는 곧 석가모니 부모의 이름이다.
 
이들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당연히 아들로서 석가모니라 이름 지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왕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첫 딸을 낳았으니 그가 곧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德曼> 공주였다.
 
진평왕은 끝내 왕자를 두지 못한다.
 
신라에서는 왕자가 없으면 공주의 남편이 왕위를 이었다.
 
부마도 없을 때에는 화백회의를 열어 귀족 중에서 덕망 있는 자를 선출하였다.
 
그런데 진평왕의 자신의 왕실이 진골<眞骨> 귀족들과 달리 성골<聖骨>이라는 별도의 거록한 신분임을 주장하며 왕실간 근친혼을 해왔는데 문제는 왕자는 물론 사위로 삼을 만한 성골 남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너무 조건이 좋은 남자나 여자가 결혼 상대를 만나지 못하여 고민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결국 덕만 공주는 결혼은 하였으나 곧바로 남편과 사별하고 이후 마땅한 재혼 상대가 없어 그만 독신으로 살아야 했던 듯하다.
 
진평왕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장녀 덕만 공주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당시 왜(일본)에 여왕인 스이코<推古>가 있었던 사실도 그의 결심을 북돋았을 듯한데 특히 덕만 공주는 여자이지만 언젠가는 부처가 되기로 약속되어 있다는 논리를 계발하여 즉위의 타당성을 주장하였다.
 
불교국가에서 왕은 곧 부처와 동격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빌어 공주의 여왕 됨이 하늘의 뜻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귀족인 칠숙과 석품이 주모하여 진평왕53년(631)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평정되고 주모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여왕은 능력을 과시하였다.
 
즉위와 동시에 큰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지배들은 흔히 웅장한 건축물을 통해 능력과 존재를 과시하곤 하는데 여왕도 그리하였다.
 
대사찰인 황룡사가 있는데도 꽤 규모 있는 분황사<芬皇寺>를 곁에 건축하였다.
 
분황<芬皇>은 향기로운 임금이란 뜻으로 향기로운 임금의 절이라는 이 분황사는 곧 향기나는 여왕 선덕 여왕의 절인 것이다.
 
여왕은 분황사 이외에 영묘사<靈妙寺>라는 큰 절을 짓는 데도 적극 시주하며 도왔는데 이 절은 선덕 여왕과 관련된 설화에 자주 등장한다.
 
당시에 국제정세는 신라에게 매우 힘들게 돌아갔다.
 
백제의 의자왕(재위 641~660)은 드센 침략으로 신라를 궁지로 몰았다.
 
백제군은 642년 신라를 침공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이어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성주로 있었던 대야성을 쳐서 성주내외를 위시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성을 차지하였다.
 
더구나 백제는 신라의 대중국 교류의 항구인 당항성을 포함한 한강유역의 명도 되찾으려고 고구려의 연개소문 정권과 우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신라는 아연실색하여 김춘추를 고규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고구려는 과거 진흥왕대에 거저 주다시피 한 남한강 유역의 영토를 돌려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신라는 결국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라 사신을 맞은 당 태종은 “네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주위 나라들이 무시하고 있는데 내가 나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신라국의 왕을 삼되 한 사람이 가서 남의 나라 왕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군사 천 명을 같이 보내어 보호하고 그대 나라가 안정된 다음에 스스로 지키게 함이 어떠한가”라고 하며 여왕 제위를 문제 삼아 신라 지배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놀란 신라 조정에서는 곧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당나라에서 긴급 귀환한 자장법사의 건의로 황룡사에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9층 목탑을 건설하여 국내외에 여왕의 건재를 과시한 것이다.
 
당 태종의 여왕에 대한 불신 표명은 여왕 반대 세력을 자극하였다.
 
탑이 완성된 그 다음해(649) 정월 초에 상대동 비담은 많은 귀족들의 호응 속에 여왕은 정치를 잘못한다라고 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 김춘추 등이 적극 진압에 나서서 평정되었지만 반란군의 기세는 초반에서 후반까지 왕실 군대를 크게 위협하였다.
 
반란의 와중에 상심하여 쓰러진 여왕은 정월 초여드레 날에 반월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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