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미래신문
최종편집 : 2022.8.19 11:34
뉴스 피플 기획ㆍ특집 사설ㆍ칼럼 포토 학생ㆍ시민(주부)기자 독자마당
> 뉴스 > 오피니언 > 기고 | 미래춘추
     
불행을 초래한 역사의 대립과 갈등
2021년 11월 05일 (금) 10:38:06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우리가 정말 잊어서는 안 되는 좋지 않은 역사가 있다.

처음에는 선의의 경쟁을 하다가 차츰차츰 경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상대를 이기는데 골몰하고 이론을 떠나 물리적 공격을 하고 그것이 격화되면서 상대를 무시하고 배제하다가 아예 살육전을 벌여 상대의 대<代>를 끊어버리는 잔인함을 드러낸다.
 
그것도 모자라 차라리 나라를 외국에게 넘기더라도 상대와는 죽어도 화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지독함의 역사가 있다.
 
임진왜란도 병자호란도 경술국치도 6·25도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만약 동인<東人>이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였다면, 만약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황윤길<黃允吉>(1536~?)과 같이 일본의 침략 의도를 사실대로 말했다면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일치단결하여 전 국토가 초토화 되고 수많은 백성이 혹독하게 유린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노론이 광해군을 폐위하는 쿠데타가 없었다면 청나라의 실체를 바로 알고 적절한 외교적 처신을 하였더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삼전도<三田渡>의 굴욕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리한 북벌 계획을 권력사수의 수단으로 삼지 말고 민생을 위해서 지혜와 힘을 모았더라면 조선 후기 혹독한 부정부패 가렴주구를 바로 잡았을 것이다.
 
구한말 외세에 기대어 자신의 욕심과 영달을 꾀하지 않고 조금씩 양보하여 조화를 이루었다면 일국의 왕비가 일본의 한낱 낭인<浪人>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며 조선이 열강의 전쟁터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합심하여 외세에 맞섰다면 망국의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정치의 중심에 있는 양 김 씨가 80년대에 서로 끝까지 협력했더라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훨씬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불행의 이면에는 모두 앞에서 말한 오불<五不>이 있다.
 
우리시대의 오불은 당연히 우리 스스로가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는 이른 잘못을 바로 잡을 가치기준과 이를 사회적으로 실현해 나갈 중심인물이 많이 부족하다.
 
곧 사회적 공론을 주도할 사람이 없다.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너무 이념의 한 끝에 서 있는 상황을 많이 본다.
아예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높으신 분들을 많이 본다.
 
 
특히 고비마다 이러한 광태<狂態>를 준엄하게 꾸짖고 바로 잡아주는 사회적 공론<公論>을 주도하는 시민정신이 살아있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동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충서의 정신을 함양한 올곧은 선비와 군자가 많아야 하고 이로부터 시대의 공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은 이러한 유학의 정신을 함양하여 조선조 선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전하의 국시는 이미 잘못 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잃어버렸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가 회오리바람과 폭우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고 있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랩니다.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 심기를 못에서 용이 잡아당기듯 하며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하니 피부가 다 해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도 모릅니다. 신이 이 때문에 길이 생각하고 깊이 탄식하면서 낮에 우러러 하늘을 본 것이 여러 번이었으며 혀를 차고 눈물을 참으며 밤에 천장을 쳐다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으시지만 구중궁궐 속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들일 따름이니 하늘의 온갖 재앙과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하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이 상소문으로 인해 남명은 자칫 큰 불행을 당할 뻔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 사람의 본보기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남명의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상소는 그가 55세 되던 1555년 명종 10년에 올린 글이다.
 
당시의 조선사회는 초기의 건국정신은 사라지고 내부적인 모순과 갈등이 심해지던 때였으며 윤원형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감히 드러내 놓고 왕과 왕가를 향한 준엄한 비판을 함으로써 공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고성미래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고성미래신문(http://www.gof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 163(2층)  |  대표전화 : 055)672-3811~3  |  팩스 : 055)672-3814  |  사업자번호 612-81-25521
등록번호 : 경남 아 00137(인터넷신문)  |  등록일 : 2011년 4월 7일  |  발행년월일:2011년 4월 20일  |  발행인ㆍ편집인 : 류정열
청소년보호책임자 : 한태웅
기사 등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 및 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2011 고성미래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gof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