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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혼상제의 간소화
2021년 11월 05일 (금) 10:37:24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강홍우 고성문협 자문위원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결혼을 알리는 청첩장이 휴대전화 문자로 온다.
 
새로운 덧붙임 내용은 청첩장 양식에 ‘마음 전하는 곳’이 생겨난 것이다.
 
이 ‘마음 전하는 곳’ 양식은 결혼뿐만 아니라 장례 알림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코로나 19가 전염되자 대소사의 알림장도 변한 것이다.
 
전에는 대소사의 연락을 받으면 가족에게 전화하여 “성의를 보여야겠으니 송금할 계좌를 알려주기 바란다”라는 전화를 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버젓이 양식에 포함되어 알려온다.
 
일일이 대답하기도 귀찮으니, 서로가 편리하게 되었다.
 
다만 성의를 표하지 않아도 될 사이에서 알려오니 문제이다.
 
정부는 1973년에 허례허식을 없애고 대소사(大小事)를 간소화하자는 뜻에서 ‘가정의례준칙’을 만들었다.
 
경제 발전과 함께 가정의례는 호화와 사치가 심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뇌물성 축·조의금도 성행하였다.
 
이에 가정에서 치르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의례에 관한 의식과 번거로운 절차를 간소하게 고쳐, 낭비를 막고 건전한 생활 자세를 기르는 데 목적을 두고 ‘건전가정의례준칙(健全家庭儀禮準則)’이 제정, 공포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치르면서 너무 형식에 얽매여 왔다.
 
이 준칙이 올해 초에 새로 개정되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라 함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유교식 상례로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 국가(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에서 이루어진 기본예절이다.
 
지금까지도 대부분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으나, 종교의 다양화 등 점차로 간소화해 가는 경향이 있다.
 
관례(冠禮)는 성인식에 해당하는 유교 의례로 상투를 틀어 갓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절차로서, 남자아이가 20세가 되면 관례를 행하고(여자의 경우는 15세) 그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계례를 행하였다.
 
이 나이에는 정신과 육체가 성숙한 시기이다.
 
지금의 ‘성년의 날’과 유사하다.
 
고려 때 일부와 조선 시대에는 가례에 따라 관례를 치렀으나, 근래에 들어와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이 내려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관례를 보지 못했다.
 
얼마 전 일본에 관광을 갔더니 일본의 전통 복장을 한 청소년이 무리 지어 지나갔다.
알고 보니 그날이 일본의 성년의 날이었다.
 
혼례(婚禮)는 청춘 남녀의 결혼식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도 행해지고 있으나, 전통 혼례식은 간혹 행해지기는 하지만 주로 예식장에서 현대식으로 치러진다. 
 
혼례는 육례(六禮)가 있었으며 4례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가 통용되어왔다.
 
요즘은 연애로 배우자를 만나고, 사회문화 조류와 가정의례준칙법에 의하여 이런 전통 결혼식 풍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옛날에는 결혼 때는 일가친척에게 알리고 품앗이를 한다.
 
떡 돼지 등을 품앗이하는데, 나는 시루떡 품앗이에 함께하여 고생한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에 할머니의 언니 집이 있었다.
 
떡 한 동이 품앗이로 쌀을 지게에 지고 10리 길의 떡 방앗간에 가서 떡을 해 걸어서 갔다.
 
그때에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녀서 걸어가야 했다.
 
비포장 자갈길이라 걷기도 불편했다.
 
차가운 겨울에 할머니는 한복 차림에 머리에 명주 수건을 썼다.
 
친척 집에 도착하니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장례(葬禮)식에는 상여를 준비하여 여러 사람이 매고 산으로 간다.
 
절차도 복잡해서 호상이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그 풍습이 차츰 변화되어 매장 식의 장례가 사라지고 화장(火葬)문화가 이뤄졌다.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유골을 모셔 놓고 제삿날이나 명절에 찾아 고인을 기리더니 그것마저 간소화되어, 재를 산천에 뿌리는 오늘날 실정이다.
 
장례를 치르면 빈소(殯所)를 차려 놓고 1년 동안 조석으로 제사를 지내고 소상이라 하여 1년 후 탈상을 했으며, 이름 있는 가문에서는 3년 동안 빈소나 산막을 차려 놓고 지내다가 탈상을 했다.
 
부모의 생전에는 불효를 저질렀으나 허례허식으로 죽어서는 귀한 음식에 자반 생선을 차려 놓았다.
 
내 기억으로는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상(喪)을 지낸 것으로 안다. 
 
초상이 나면 동네 청년들을 소환하여 여비를 주어 부고를 전하게 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장례도 3일 장(葬)을 하지 않고 5일 장이니 심지어 보름 장을 치렀다.
 
요즘처럼 3일 장이면 부고를 배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일가 친척에게는 속달 우편으로 전하기도 했다.
 
부고는 근래 3일 장을 하면서부터 인쇄하는 것이 사라졌다. 
 
마을에서 초상이 나면 부고를 학교에 와서 등사판으로 만들어 썼다.
 
나는 교직에 있었기 때문에 몇 번 원지를 철필로 긁어서 만들어 준 적이 있다.  
 
제사(祭祀)에 관해서는 나는 부친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어릴 때는 할아버지의 유교 사상으로 제사에 참여했다.
 
제사는 밤중에 지내기 때문에 어린 나는 밤중에 일어나기가 고충스러웠고 제사 중에 잠이 든 때도 있었다.
 
커서는 위폐나 축문을 내가 쓴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일부러 장손인 나에게 가르치신 것으로 안다.
 
제사 때에는 집안 여성들의 노고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부산에 갔더니 앞집에는 아침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밤중에 지내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문화 충격이 컸다.
 
진정한 의미의 ‘관혼상제’를 새로운 변화에 맞게 되살릴 때, 전통으로서의 현대적 관혼상제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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