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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팔국 전쟁
2021년 08월 27일 (금) 11:17:56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정호용 전 고성군의회 의원
1) 포상팔국 전쟁에 대한 문헌 기록
포상팔국의 난은 신라인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지만 당대인이 오래 기억을 살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 三國史記 신라본기와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에 전하여 지고 있어,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에 최근의 연구성과는 전쟁의 대상도 加羅國(금관가야)와 蒲上八國, 阿羅國(아라가야)와 蒲上八國 사이의 전쟁에 신라가 개입한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다.
가야 내부의 문제로 시작은 포상팔국과 가라국 내지 아라국과의 전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마무리 되고 있는 것이다.
포상팔국의 난, 포상팔국의 전쟁 경과를 정리해 본다.
① 신라 나해왕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팔국이 모의하여 加羅(阿羅)를 침략하였다. (三國史記 신라본기, 열전 물계자전)
② 가라왕자(아라사신)가 新羅에 구원을 청하였다.(三國史記 신라본기)
③ 신라왕이 태자 우로와 伊伐飡 이음에게 명하여 가라를 구원하고 8군의 왕을 격살했다.(三國遺事 신라본기)
④ 포로가 되었던 6천 인을 빼앗아 加羅에 돌려 주었다.(三國史記 신라본기)
? 나해왕 17년(212) 봄 가야가 왕자를 신라에 보내 볼모로 삼아다.(三國史記 신라본기)
? 나해왕 17년에 保羅國, 古自國, 史勿國 등 8국이 힘을 합쳐서 변경을 침범해 왔다. 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 내해왕은 태자(왕손) 내음과 將軍 이벌 등에게 명하여 가까운 군과 六部兵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고 8국은 모두 항복했다.(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
? 내해왕 20년(215) 을미에 骨浦國, 漆浦國, 古史浦國 등 3국의 왕이 각기 군사를 거너리고 와서 갈화(울산)을 공격했다. 신라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니 3국이 모두 패했다.(三國史記 열전 물계자전, 三國遺事 물계자조)   
 
2) 포상팔국 전쟁의 시기 및 대상
위에서처럼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상 기록에서, 관련된 국가로 포상팔국, 가라, 아라, 신라 등이 등장하며, 관련 인물로 于老(于老音), 利音(?音), 將軍 一伐, 勿稽子 등이 나온다.
 
사료상의 연대는 신라 奈解尼師今대이나, 사료 비판을 통해 3세기 전반, 3세기 후반, 4세기 전반, 4세기 후반, 5세기 전반, 6세기 중반, 7세기 등 다양한 연대폭을 상정하고 있다.
이는 이 전쟁 기사가 다양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건과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사료 그대로 이 전쟁이 일어난 시점을 3세기 전반으로 볼 수도 있으나, 4세기 전반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3세기 전반이든 4세기 전반이든 상관없이 이 시기에 포상팔국의 범위나 軍勢를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는 검출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포상팔국은 남해안을 따라 분포한 소국의 연맹으로 간주하고 있어 후대의 소가야의 범위와 겹치고 있다.
이 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4세기 이후에 이루어진 낙랑·대방군-마한-변한-왜를 연결하는 교역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연구에서 2세기 중반까지 번영을 누리던 사천 勒道 중심의 교역체계가 3세기 이후에 狗倻國(가락국, 금관가야) 중심의 교역체계로 전환하였다는 설명이다.
새로이 교역을 주도하는 김해의 구야국에 대해 늑도를 중심으로 한 포상팔국이 반발한 사건으로 포상팔국의 난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포상팔국의 난과 관련된 시점은 다양한 연대폭을 보이고 있는데, 3~5세기까지로 볼 정도로 시기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포상팔국의 융기, 가라국(금관가야)의 쇠퇴 등 여러 시기의 사실이 하나의 사실에 녹아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5세기에 걸친 신라와 대가야의 전쟁에 대한 경험이 이 기록에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포상팔국의 전쟁은 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3세기 초부터 5세기 전반에 걸친 장기간의 국제정세를 반영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남해안에서 이루어진 해상무역의 주도권은 사천 늑도(사물국, 보라국)→구야국(가락국, 금관가야)→탁순 아라국→고자국(소가야)→대가야(섬진강) 하구) 등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포상팔국의 난이 전개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3) 포상팔국 전쟁의 성격
포상팔국 전쟁의 성격을 교역권과 관련한 가야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가야 내부의 전쟁으로 볼 수 있겠으나 오히려 신라 대 가야연맹의 대결구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가야 내부의 갈등에서 시작되었으나 전쟁이 그 과정에서 新羅대 蒲上八國간의 전쟁으로 발전되고 있다.
전쟁은 최종적으로 가야 내부의 분열과 신라에의 예속을 가져다 주었다.
포상팔국의 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이 전쟁에 우로가 참여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만 나오고 있어,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상팔국의 난에 활약한 신라인은 이벌찬 이음과 장군 일벌이며, 실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인물은 물계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 더 중요한 전쟁은 포상팔국과 가라국 안아국의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포상팔국 중에서 삼국의 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원정한 신라 갈화성 전투가 될 것이다. 
신라에서도 국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던 것이다.
신라의 국가형태는 중앙은 6부로 나누어져 있고, 지방에는 소국이 자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신라국왕은 개별 6부와 지방 소국의 자치력을 인정하면서도 전시에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국왕의 아래에 통합시키고 있다.
신라는 점차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여 가는 방식을 선택하였고 후대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어 6세기 중기 이후에는 중앙집권화를 이루게 된다.
반면 가야는 독립적인 자연지형인 분지나 해안을 기반으로 국가가 건립되어 개별 소국의 독자성과 자율성이 강하였다.
전시의 군사권과 외교권도 개별 소국이 행사하였다.
포상팔국 전쟁에서도 8국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각자 국왕이나 장군의 지휘하에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신라에 비해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가야는 개별 소국이 그 독자성과 자율성을 토대로 형성된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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