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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바로 세우기 유배에서 복권까지 ①
2021년 07월 09일 (금) 10:53:41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왕조 중에서 죽은 후 왕의 권리와 지위를 얻지 못한 왕은 누구일까.
 
대부분 연산군과 광해군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단종 역시 200여 년 이상 노산군이라는 왕자의 지위로 기억되고 있었다.
 
실록도 단종실록이 아닌 노산군 일기였고 무덤 역시 장릉<莊陵>이 아닌 노산군 묘로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그럼 누가 단종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일까.
 
해답은 숙종이다.
 
숙종시대는 조선후기 성리학에 대한 이념강화가 가장 적극적으로 표출된 시대였고 조선시대관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결과, 단종은 노산군의 명예를 벗고 조선의 왕으로 거듭 태어나게 됐다.
 
1456년 6월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상왕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에 대한 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이즈음 금성 대군이 다시 역모에 연루되는 사건이 벌여지게 된다.
 
성상문, 박팽년 등이 중심이 된 단종 복위 운동의 전모가 발각되면서 금성대군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바로 금성대군의 옛 집이 이들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있는 상왕의 존재 자체가 역모의 구심점이 되자 세조는 1457년 6월 마침내 단종의 유배를 결정하였다.
 
유배지로 결정된 곳은 강원도 영월 첩첩 산중으로 둘러싸인 오지인데다가 청령포 지역은 사면이 강이나 산으로 막혀있어 천혜의 유배지였다.
 
실록에 의하면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현재의 광진구 화암동에 위치한 화양장터 화영정은 당시 세종의 별장이 있었던 곳으로 세조는 내시 안로를 시켜 이곳에 조촐한 잔치를 마련해 주며 단종을 배웅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고지도와 단종의 유배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단종은 화양정에서 광나루를 거쳐 이곳에서 배를 타고 여주의 이포나루에 도착하였고 이후의 여정은 여주에서 원주, 영월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주군 상구리의 단종 어수정 단강초등학교에 남아있는 단종지(단종이 쉬어간 정자) 등은 단종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6월 28일 단종은 마침내 청령포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쪽은 기암절벽으로 구성되어 마치 사방에 요쇄를 설치한 모양을 띄고 있다.
 
동남북 3면이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의 강줄기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한 산줄기 절벽으로 막혀 있다.
 
육지이면서도 철저히 고립된 섬과 같은 형태를 띄고 있어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처럼 세조가 천혜의 유배지를 찾아낸 것은 단종이 도저히 재기를 도모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청령포 안에는 지금도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짐작하게 하는 6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600년 전 유배생활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단종이 매일 올랐다는 이 소나무는 단종의 행동을 지켜 본 유일무이한 소나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당시 처절했던 단종의 생활을 보았으니 관<觀>이요. 단종의 오열을 날마다 들었으니 음<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단종의 최후의 노산군 묘 단종이 유배지에 온 후 3~4개월 후 정국은 또 다시 들끓었다.
 
이미 단종복위운동을 시도했다가 순흥으로 유배되었던 금성 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금성대군의 처벌과 함께 단종의 처벌까지 주장하였다.
 
왕실의 종친들과 효령대군, 양녕대군까지 단종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세조는 1457년 10월 21일 단종의 처형을 명하였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고 기록하였지만 세조가 직접 죽음을 지휘한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된다.
 
인조 때 나만갑이 지은 병지록에는 세조가 보낸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차마 어명을 전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단종 스스로 활시위를 목에 감고 옆에 심부름 하던 사람을 시켜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1457년 단종이 영월 산중에서 죽음을 당했을 때는 그의 주검을 거두는 이 조차 없었다.
 
이 때 영월 호장<戶長>(요즈음 군청 과장 급) 엄홍도가 나섰다.
 
그는 한 밤 중에 몰래 엄홍도의 아들 삼형제와 함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헤매던 중 노루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
 
이후 단종의 무덤은 1517년(중종11) 왕명으로 찾을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무덤을 찾은 후에도 계속 노산군 묘로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릉 대부분이 후왕들의 참배의 이유 등으로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되었는데 비해 단종의 무덤만 유독 떨어져 있는 것도 단종이 죽은 직후에 왕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릉은 대게 왕과 왕비의 무덤까지도 포함한다.
 
왕과 왕비(정비)의 무덤을 일컬어 능<陵>이라고 하였고 왕의 사친이나 왕세자의 무덤은 원<園>이라고 칭하였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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