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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이지함<李之函>의 사회생활
2021년 04월 16일 (금) 10:48:56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gofnews@naver.com

   
 
토정 이지함<李之函>(1517~1578)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역사적인 위상보다도 그의 저술로 알려진 ‘토정비결’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그의 기인적인 풍모만이 야사의 주된 소재가 되고 또한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지함에 대해 갖는 대중적인 친숙성에 비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지함은 16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가 제시한 국가증진시책과 민생안정책, 그리고 사회경제사상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적극적인, 진보적인 것이었다.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 부강한 조선국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면서 부강한 조선국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제시했던 이지함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명문가의 후손인 이지함은 자는 형백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 조가 된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은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이지함 가문의 영예는 조금 퇴색하여 조부 장윤과 부치는 각각 현감과 현령직에 머물렀다.
이지함은 1517년 이치(1471~1530)의 아들로 충청도 보령군 청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이치는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미 사망한 종조부 이파<李坡>와 성종 때의 폐비사건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의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지함은 14세 되던 해에 부친이 죽자 형인 이지번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지번의 아들 이산해는 후에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내면서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이지함에게는 산두, 산휘, 산룡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산휘는 호랑이에게 물려죽고 셋째 산룡은 12살 때 역질로 죽었다.
서자인 이산겸은 임진왜란 때의 병장으로 활약했다.
이지함은 1573년(선조6) 탁행<卓行>이 알려져 최영건, 정인홍 등과 함께 조정의 천거를 받아 종6품의 포천형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건의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1578년에 다시 천거를 받아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다시 그의 생각을 실천 할 기회를 갖게 된 이지함은 걸인청<乞人廳>을 만드는 등 노약자와 고통 받는 백성들의 구호에 힘을 기울였으며 현감으로서 경험한 시무책을 담은 소<訴>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지함은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 실상을 알면서도 백성들을 부당하게 군역에 넣어야 하는 실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지함이 역병으로 곧 사망했기 때문에 상소문에서 제시한 시무책은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지함에 대해서는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 그의 개방적 학풍과 교육관계, 그리고 토정비결이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한 점 등으로 그의 신분을 한미하게 보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이지함의 가계가 이색의 후손으로 조카 대에는 영의정을 배출한 양반 가문 중에서도 명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신분적 개방성은 가문을 초월한 것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토정이라는 그의 호는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으로 지금의 마포 강변에 허름한 집을 짓고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을 정자 삼아 글을 읽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에도 마포는 서해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물산의 집산지로서 상업과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으며 마포의 토정은 강가에 바로 직면한 곳이었다.
이지함의 주된 근거지 또한 충청 해안 지역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는 일찍부터 상업과 어업, 유통경제의 안목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흔히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는데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으로볼 때 이지함의 이름을 후대에 기탁한 것이라는 주장비 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토정비결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과 이지함의 사상이 상통하는 측면이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 한 상수학<象數學>의 사고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지함이 스승인 화담<花潭> 서경덕에게서 상수학을 배운 것은 이지함과 이책의 연관성을 넓혀주고 있다.
서경덕 등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자들이 기<氣>에 관심을 가지면서 당시의 사회상황을 변화가 요구되는 시기로 파악한 점과 이지함이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주역의 책안에 내포된 새로운 변혁의지가 토정비결에도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덕형이 “이지함을 염두에 두고 세상에서 풍수지리학을 숭상하고 믿음을 준 것은 이 씨 집안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러한 초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에 책에 그의 관한 기록이 풍부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이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게는 철저히 엄격했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전문에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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