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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독립운동사
2021년 03월 26일 (금) 11:40:21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자손이 영민하면 선조가 큼직한 증직 벼슬을 받아 묘 앞에 넓직한 대비를 세우고 제자가 학문이 넓으면 그 선생이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자식과 학생을 잘 훈도하고 훈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인물의 평가가 시대상황이 얄궂거나 왜곡된 변화추이의 굴곡에 의해 제자와 자손이 모두 포장 받아야 마땅한데도 폄척<貶斥>되거나 잊혀져 가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러한 실상과 책임은 당대와 후세의 이른바 글과 말 그리고 실천으로서 진실과 정의를 밝힌다는 이른바 학자나 소위 지식인 학문을 하는 인간들의 직무유기나 곡학아세 및 소탐대실 등의 시대정신의 정화<精華>를 망각하는 진정한 선비나 학자, 같잖은 정신상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심산 김창숙은 1879년 7월 10일에 태어났으며 조선조에 명성이 진동하였던 동강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13대 종손이다.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 유학자였던 면우 곽종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당시 시국이 외세의 억압과 침탈로 날로 글러지고 있는 것에 대한 구국의 시대정신에 감발<感發>한 바 많았다.
 
특히 “세속학자들이 한갓 성리<性理>의 오묘한 뜻만 깊이 고민할 뿐인데 심신은 탄식하며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성인이 세상을 구제한 뜻을 깨닫지 못하면 이는 가짜 선비이다. 제거해야만 비로서 치국평천하의 도를 논하는 데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듣는 좌중이 모두 떠들썩하였다.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이긴 기세를 타고 일본이 우리 한국에 대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니 김창숙은 대계 이승희를 따라 서울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으나 회답이 없어 통곡하고 돌아왔다.
 
1907년 11월에 국가에 대해 애국정신이 투철한 인사들 중 권동진, 오세창, 장지연, 남궁억 등이 대한협회를 창립하자 이에 심산 김창숙은 친절한 동료들과 상의하여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향사당에 설치하고 그 총무가 되어 “이 모임은 장차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다. 구국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구습을 혁파하여 계급타파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고루한 유생들이 이를 매도하는 자도 있었고 부자간에 나빠진 경우도 있었으며 일본 순사들이 칼을 빼들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9년 일진회 반역 매국노인 송병준과 이용구 등이 통감 이등방문의 사주를 받아 일본정부에 한일 합방론을 제창하여 투서하자 왜적들은 이는 조선 사람들의 진정한 소원이라 하였다.
 
심산은 역적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라고 하면서 글을 작성하여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향교에 70여 명이 모였다.
 
심산 김창숙은 7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이를 직접 경성에 있는 중추원사무체에 바치고 경성에서 발간하는 여러 신문에 게재하였으니 성주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 헌병대에서 주모자 김창숙을 일년의 형무소 생활을 하게 하였다.
 
그 후 김창숙은 제1차 유림단 사건(파리장서), 제2차 유림단 사건을 주도하였고 만주에서 독립군 기지 건설에 앞장섰으며 독립군 조직의 군사부 고문을 맡아 의열단과 합작하여 국내와 국내와 중국에서 열혈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등을 지내다가 1927년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4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 대전 왜관감옥 복역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세 아들 중 두 아들을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목숨을 잃었다.
 
8.15 해방 후 미군정과 신탁통치,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 겪은 후 독재자 이승만의 권력말기현상이 드러났으며 국정파탄 자유당 국회의 악법양산, 부정선거 등에 대한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저항과 이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무지막지하였다.
 
김창숙은 해방 뒤 민주의원의 의원을 지내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을 추진했으며,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을 창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한 데 이어 1953년 총장이 되었다.
 
이승만은 1957년 자신에게 비판적인 유도회를 어용하고자 일제 때 친일 유림들의 이른바 황도 유교를 부르짖는 자들을 내세워 유도회 총본부의 내분을 조장하고 그 분란을 빌미삼아 심산 김창숙을 심지어 정치 깡패들까지 동원하여 선균관장과 성균대학 총장직에서 축출(1956)하였으며 유도회 총본부장인 심산을 쫓아내고 유도회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김창숙은 상해임시정부 시절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한 것에 대해 신채호, 이회영 등과 거세게 반대 타마한 것을 비롯하여 줄곧 이승만 외교독립운동 노선에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승만이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취개현 안을 통과시킬 때는 이승만 하야 경고문을 발표하여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는 등 이승만 독재정치에 온몸으로 저항하였다.
 
1970년에 정부에서 성주읍에 심산 김창숙 기념관을 건립하고 성주군청 과장 1인을 파견하여 근무토록 하였으며 기념관 마당에는 경북대학 교수가 비문을 지어 대비가 세워져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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