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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021년 01월 29일 (금) 11:41:42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한 최고의 인물하면 당연히 이순신(1545~1598) 장군을 떠올린다.
2014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명량은 지금까지도 이순신 장군이 한국 최고의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인순신의 명성만큼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을 추천한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다.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연상이었으며, 왜란 당시 지위도 현재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영의정이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임진왜란을 겪은 류성룡은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징비록<懲毖錄>을 작성하였다.

징비록에는 1592년(선조25년)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쳐 악전고투한 쓰라린 원인과 풍전등화와 같은 정황, 상황에 대한 반성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징비록<懲毖錄>은 저자 류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책이다.
제목인 징비<懲毖>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의 예기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스스로 쓴 서문의 첫머리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의 전투의 승패를 기록한 글이다.
그 기록 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사건들을 가끔 기록한 내용은 그 전쟁의 전말을 밝혀 무질서한 전란의 원인과 정치권의 무방비의 상태와 안일한 정치권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어서 서문에서는 나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어지러운 시기에 국가의 중책을 맡아서 위태로운 전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국민의 저주의 원성을 붙들어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오히려 시골구석에서 목숨을 구차하게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며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처해 있는 국가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징비록이란 책자를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 칠년의 전란 속에 국가는 백천간두<百尺竿頭>에 처해있고 국민은 농사를 버리고 계곡으로 산으로 피난으로 구명도생<苟命徒生>의 길을 떠나 전전긍긍<戰戰兢兢>으로 풍비박산<風飛雹散>,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그 처절한 광경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 했다.
 
류성룡은 1542년(중종37년) 외가인 경상도 의성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서울에 올라와 남산의 묵사동 즉 현재의 남산한옥마을 인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 가을에 향시에 급제했고 1562년 21세 때 안동의 도산에서 퇴계 이황을 배알한 뒤 그 문하로 들어가 근시록 등을 배웠다.

1564년 7월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고 1565년 성균관에 들어갔다.
25세가 되던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자부정자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1567년 8월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1570년에는 수찬·정언 등을 거쳐 이조좌랑에 올랐다.
1571년 3월 이황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이해 가을에 호를 서애<西厓>라 하였다.
서애는 안동 하회마을의 서쪽 절벽을 뜻하는 말이다.

1573년 6월 다시 이조좌랑에 올랐고 1575년 9월에는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헌납·응고·사간을 거쳐 1581년에는 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때 왕명으로 ‘대학연의’를 초하여 올렸다.
1582년 봄에 대사관 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쳤으며 1588년 7월에는 함경도 관찰사에 특채 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사양했다.
1584년 예조판서가 되었으며 1585년에는 왕명으로 정몽주의 문집을 포은집으로 교정하고 그 발문을 썼다.
1589년에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당시 정여립 역모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여파로 동인 내에서 당파가 분리되었는데 이 때 이발과 정인홍, 이산해가 중심이 된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정인홍과 이산해와는 정치적으로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159년 5월 우의정에 올랐으며 1591년에는 좌의정으로서 이조판서를 겸하면서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였다.

정읍현감이 종6품이고 전라좌수사가 정3품이므로 무려 7등급이나 올리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 때 류성룡은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기도 했는데 임진왤나 당시 이순신과 권율의 활약 뒤에는 인재를 알아보는 류성룡의 안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좌의정과 병조판서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전 시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해 5월에 개성에서 영의정에 임면되 후 바로 파직되었으나 계속 선조를 수행하면서 평안도 도체찰사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논의하였고 평양성 탈환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며 왜적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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