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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만면(九萬面) 이야기①
최시혁 - 구만면
2021년 01월 22일 (금) 11:28:20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고향인 구만에 살면서도 내가 구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여러분 또한 어떠하신지?

 
구만이 품고 있는 자연과, 잊혀져 가는 구만의 역사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구만 이야기를 계기로 함께 나누어, 구만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구만의 가치를 재정립(定立)하는 데 의미를 두면서, 고향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나 둘씩 나누고자 한다.
 
구만면은 낙남 정맥의 능선을 형성하는 필두봉(서쪽), 용암산(북쪽), 적석산(동쪽)사이에 자리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깃대봉(소태산)과 월계산이 작지만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와룡 마을이 있는 서쪽에는 용두산이 마치 용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어, 지리학적으로 전형적인 분지 형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적석산(積石山,497m)은 3개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돌로써 쌓여져 있다고 하여 적석산(적산)으로 명명된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사계절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고, 천통문, 구름다리, 마당바위 등 아담하고 스릴 넘치는 명소(名所)가 곳곳에 있다.
 
적산 등산을 구만면 번듯 고개에서 시작하면, 편안한 산행의 즐거움을 더하리라 추천한다.
 
작년에 적석산에서 깃대봉, 방화산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정비하여, 구만면의 동쪽 능선을 약 3시간 산책하는 숲길 코스로, 등산 매니어들에게는 또 다른 재미를 안겨주고 있다.  
 
구만면은 면 소재지가 있는 낙동 마을 면사무소에서 방송을 하면, 필두봉 아래 저동 마을 회관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들리고, 면 전체의 풍경을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필두봉과 용암산이 배수진(背水陣)을 하고, 남향에 위치한 화촌, 당산, 연동, 저동 마을은 귀촌인들의 주거를 위한 망치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덕암, 중암, 광암, 낙동, 효대, 주평, 신계, 선동, 와룡 등으로 14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구만이라는 말의 아홉(九)은, 독뫼(흔히들 똥매)라는 크고 작은 뫼가 아홉 개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중 당산마을 앞과 광암마을, 낙동 마을에 있는 큰 독뫼 세 개는, 세월의 유구(悠久)함에도 존재하고 있다.
 
구만면은 고성군과 경상남도에서도 면의 면적으로는 제일 작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일 때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일제 식민지 시대에, 구만면은 고성군에서 정신적인 지주(支柱)였고, 고성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고장이었다.
 
그런 조상들의 정신과 혼이 14마을에 깃든 것일지 모르나, 구만 고을에서 학문과 학자, 행정에 관여하는 훌륭한 인물이 수 없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구만을 인물(人物)과 양반(兩班)의 고장이라고 옛부터 일러 왔다.
 
그런 고장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自矜心)을 느끼면서, 고향 구만의 모습이 구만답게 발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 조용하고 한가롭던 농촌이 지금 작은 변화를 잉태(孕胎)하고 있다. 작년에 구만면 중심지 활성화 사업이 확정되었다.
 
이 사업은 농촌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서울과 도시는 아파트를 지어도 지어도 모자라서, 정부가 농촌의 면 소재지에 투자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켜 농촌 인구의 유출을 막고, 도시의 50-60대 퇴직한 중년의 유입을 유도하고자 내 놓은 정책이다.
 
시골에서 문화에 대해서 전혀 생소한 사람들이, 노래교실, 요가, 약초, 웃음, 스포츠 댄스, 도예 등, 문화 강좌가 쏟아지니까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어 좋긴 하나, 일상이 갑자기 변하고 바빠져서 피곤해졌다.  
 
나의 소견으로 이런 농촌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감한 투자는, 20여 년 전에 시작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2021년에 활성화 사업이 마무리 된다. 
 
나는 활성화 사업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이 사업의 조력자(助力者)로서 구만의 역사를 고증(考證)하여, 진솔(眞率)된 구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 첫 번째 구만 이야기는, 조선14대왕 선조24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 5월23일 일본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기위해 조선에 길을 열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불응하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왜적은 부산을 점령하고 진주성 공격을 위해 당항포와 고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당시 고성군 구만동의 담티재는 진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라,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 전투의 중심에 최균과 최강 두 형제가 구만동에 살고 있었다.
 
형인 최균은 문인이었고 아우인 최강은 무과에 합격하였다.
 
두 형제가 주축이 되어 고성에서 맨 처음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최강은 진주성 싸움에도 몇 차례 참여하였고, 이순신 장군을 도와 진해, 당항포, 사천, 전라도 전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진주 뒤벼리에는 최강 장군의 전적(戰績)을 기리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7년의 임란이 종결되자 최강 장군은 나라의 부름으로 전라도 완도에 가서 왜적의 노략질을 화공책으로 물리쳤다.
 
완도군 가리포에도 최강 장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창원시에서도 벚꽃이 만개하는 4월이면 의병제 축제를 한다.
 
임진왜란 때 웅포해전(진해)에서 왜적을 물리친 최강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다.
 
형인 최균은 고성과 구만동에서 전략의 수립과 병기조달, 군량의 공급을 주로 하였고, 고성 의병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구만에서 개천면 청광으로 가는 길에, 풍운장(風雲將) 최균 장군의 일화가 전해오는 유명한 담티재가 있다.
 
임진왜란시 배둔에 주둔(駐屯)했던 왜군들이, 진주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가 바로 담티재였다. 
 
몰려오는 왜군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계책(計策)을 세워 왜군을 물리쳤다는 일화(逸話)는 언제 들어도 통쾌(痛快)하다. 
 
조선 23대왕 순조 16년, 임진왜란의 무공(武功)과 의병을 일으켜 세운 공훈(功勳)을 인정하여, 사후(死後)에 최균을 호조판서에, 최강은 사후(死後)에 병조판서에 벼슬을 내리고, 그 후 헌종 때 조정에서 의민공, 의숙공 시호가 내려졌다.  
 
구만면 효락1길 149-29에는 지방문화재 제160호로 지정된 소천정(蘇川亭)이란 정자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강 장군의 공적(公的)을 기리기 위해 1872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한편, 두 형제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세운 전공과, 행적을 기록한 쌍충실기(雙忠實記)-형제의 충성스러운 의병활동기가 전해져 오고, 두 형제의 충(忠),의(義)를 기리기 위해 배향한 곳이 화촌 마을에 있는 도산서원이다.
 
나라가 누란(樓欄)의 위기에 처했을 때 창의하여 활약한, 최균, 최강 두 형제 장군은 이고장의 위인이다. 
 
의민공 최균, 의숙공 최강 형제의 의병활동의 정신은, 깃대봉 산기슭 아래에 숨 쉬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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