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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의 폐위된 이유
2020년 11월 13일 (금) 14:24:20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시대의 왕의 계승은 큰아들 세습이 원칙이었으나 태종대왕까지 이 원칙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태조대왕 이승계는 계비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가 본처 소생인 방원의 반격을 받는 왕자의 난이란 극단적인 비극을 보았다.
 
왕자의 난 이후의 즉위한 2대 정종은 태조의 두 번째 아들이었으며, 그런데 또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이처럼 피를 보는 왕위 계승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태종은 누구보다도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 조선국의 기틀이 잡혀나가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의 기대대로 원경왕후는 1394년 장자 양녕대군(1394~1462, 69세)를 낳았다.
 
1404년 8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18년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양녕대군은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로 추방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된 지 14년만에 일이다.
 
황희 등 조정의 원로 대신들 중 일부가 반대했지만 오히려 이들은 태종에 의해 유배의 가혹한 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정황을 태종실록에서 살펴보자.
 
세자 이제<李提>를 폐하여 광주에 추방하고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를 삼았다.
 
임금이 백관들의 소장의 사연을 읽어보니 모골이 송연하였다.
 
이것은 이미 천명이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이에 이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실료가 청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
 
무릇 사람이 허물을 고치기는 어려우니 옛사람으로서 능히 허물을 고친 자는 오로지 태갑<太甲> 뿐이었다.
말세에 해외의 나라에 있어서 내 아들이 어찌 능히 태갑과 같겠는가.
 
나라의 근본은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만약 엄한 규정을 정하지 않는다면 민심이 흉흉할 것이다.
 
옛날에는 유복자<遺腹者>를 세위 유업을 이어 받게 하였고 또 적실<敵室>의 장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제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次子>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제<提>의 아들로서 대신 시키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하면 그 동생을 세위 후시를 삼을 것이니 왕세손이라 칭할지, 왕태손이라 칭할지는 옛 제도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라고 하였다.
 
한상경 이하의 군신<君臣>은 모두 제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으니 유정현은 말하기를 “신은 배우지 못하여 고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권도<權道>와 상경<常經>이 있으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 하고 박은<朴誾>은 말하기를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옛 제도에 있다면 가<可>합니다만 없다면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실록 태종18년 6월 3일 위의 기록에 의하면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의 행실을 문제 삼아 백관들에게 전지를 내리는 방식으로 세자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세자를 대신하여 그 아들을 태손으로 삼아야 할 바도 잠시 논의되었으나 택현<擇賢> 즉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이어졌고 결국 태종은 세 번째 아들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거듭 되는 양녕의 비행들
 
14년 동안 왕세자의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일까
 
양녕대군은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경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글공부보다는 사냥이나 풍류에 관심이 많았다.
 
글공부를 게을리 하여 주변의 사람들도 곤란을 겪었다.
 
1405년 10월 태종은 세자가 학업을 게을리 한다며 세자를 대신하여 환관들에게 태<笞> 매를 치기도 했으며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선생님들도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양녕대군과 스승인 이래<李來>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래가 궁궐에 당도하자 세자가 매 부르는 소리를 하므로 이래가 “저하께서 매 부르는 소리를 하시니 이것은 해야 할 바가 아니옵니다. 학문에 독실한 뜻을 두시고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마소서”라고 하니 양녕은 놀라는 체 하며 “평생에 매를 보지 못했는데 어찌 매 소리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래가 여러 말로 지극히 잘못은 간하므로 양녕이 원수같이 여겼다.
 
어느날은 옆 사람에게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고 그가 꿈에 보이면 그 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라고 하였다.
 
양녕은 학문에 대한 싫증은 이처럼 심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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