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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덕행
2020년 09월 18일 (금) 11:15:28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어릴 때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있었으니 21세 때부터는 영남사람의 영수 점필제 김종직(1431~1492)에게서 수학함으로써 그의 학덕이 높아졌다.
당시 점필제의 문인으로서는 김굉필과 정여창<鄭汝昌>(1450~1504) 그리고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으뜸이었다.
 
이들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으니 경남 북부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것도 그것의 한 요인이었다.
즉 스승 점필제는 밀양출신이요, 김굉필은 한양 출신이지만 증조 때부터 현풍에 살아왔던 연고로 내려왔으며 정여창은 함양이 고향이요, 김일손은 청도 출신이었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그분들의 만남은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거창, 안음, 지리산 등에서도 서로 만나 학문을 연마했다.
한훤당은 27세 때에는 생원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41세(1494) 5월에는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 은일<隱逸> 추천의 형태로 생원 김굉필은 ‘오로지 성리학에 정밀히 집중하고 조행<操行>이 방정하며 굽혀 기용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평가하며 천거했다.(성종실록 25년 5월 20일 정미)
이리하여 한훤당은 주부<主簿>로 임용되었고 이후에는 사헌부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45세에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만났다.
 
무오년 7월의 사화에서는 스승 점필제가 부관참시 되고 동문학 김일손은 처형되었으며 한훤당 자신은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다.
바로 그 유배지에 청년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부친 동행길에 찾아와 만나니 이로부터 스승과 제가 관계가 형성되었다.
 
또 26년 뒤 즉 갑자년<甲子年>(1504 연산군 10년)에는 무오당인<戊午黨人> 제거의 성격으로 또 사화가 일어나자 한훤당은 극형을 당하니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에는 연산군 때에 화를 입은 인물들에게 신원<申寃>이 가해지면서 선생에겐 도승지가 추증되었고 실천유학의 진흥과 인재 양성에 끼친 어적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한 흐름에서 1517년(중종 12년)에는 우익정에 추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610년 광해군 2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후학들의 한훤당 평가 조선조 말기 박재형<朴在馨>이 편찬한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는 한훤당 김선생은 항상 엄숙히 악관차림으로 하루를 지내며 저녁엔 어떤 생각 없는 듯이 말씀을 하지 않으면서 다만 희로애락 발현 이전의 곳에 힘쓰는 기상이었다.
 
김굉필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자네들은 감히 게으르거나 나태함이 없도록 하라. 사람들이 혹 자기를 어떻다고 말 하더라도 절대 서로 비교하여 남의 나쁜 점을 말하지 말라. 마치 피를 머금고 남에게 뱉으려면 먼저 그 입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라”라며 마땅히 이러한 점으로써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남에게 불쾌감을 낳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자기 관리를 주장했다.
 
한훤당은 특히 소학을 위주로 신유학의 정수를 체득하면서 도학군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러나 무오사화를 거쳐 갑자의 사화에는 그가 극형을 당하니 세상에서는 소학 공부는 화를 부르는 것이라는 말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를 지내고 중종시대에 이르니 한훤당은 신원의 과정을 거쳐 문묘에 배향되어야 한다는 건의가 일어났다.
 
당시 성균생원 권전<權磌> 등이 올린 상소문이 그 선례이다.
김굉필이 사람됨은 기품이 방정하고 깨끗하며 성학<星學>에 뜻이 돈독하여 그 실천에 힘써서 시청언동이 모두 공경스러웠다.
배우려는 자에게는 소학과 대학으로 일관하여 그 규모와 절도를 잡도록 했다.
원컨대 전하께서 광명을 넓히고 강건한 결단으로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게 하여 이 나라에 오래도록 이어갈 도학의 소중함을 밝혀서 백성들에게 으뜸으로 삼을 바를 알게 해주소서 하여 고려절신 정몽주와 조선조의 김굉필이 같은 날 문묘에 입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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