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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의 죽음
2020년 09월 04일 (금) 14:07:34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이 지휘한 군사들은 송현<松峴>에 있는 남은의 첩의 처소를 급습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모여 회합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 측의 선제공격이었다.
정도전은 황급히 피신했으나 결국에는 체포되어 방원의 앞에 끌려왔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도전이 도망하여 그 이웃의 판사<判事> 민부의 집으로 들어가니 민부가 아뢰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방원은 그가 정도전인 줄 알고 사람을 시켜 잡게 하였더니 정도전이 침실 안에 숨어있는지라 꾸짖어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엉금엉금 기어나와서 말하기를 “청컨대 죽이지 마소서. 정안군이 예전에도 저를 살려주셨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소서”라고 했다.
이에 이방원이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되었는데도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하고 그를 목베게 했다.
태조실록 태조7년 8월 26일 실록에 기록된 정도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분분하다.
조선 건국의 주역자이다.
 
설계자였던 혁명자의 말로 치고는 너무나도 비참하게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태조실록의 친자들이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세력인 만큼 죽음에 대한 왜곡은 어느 정도 예상된다.
몇 년 전 인류의 인기를 끌었던 ‘용의 눈물’ 드라마 에서는 실록에 기록된 정도전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게 느껴졌는지 비장하게 자결하는 것으로 그의 마지막 장면을 설정하기도 했다.
1384년 우왕9년 전라도 나주 거평부곡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농부들의 생활이 참담한 실상을 목격한 정도전은 함주막사로 들어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 장군을 찾았다.
 
이성계는 고려 말 홍건적고 왜구의 거듭되는 외침을 물리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신흥 무인 세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1380년 소년장수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한 황산대첩은 이성계의 명성을 보다 높이게 했다.
고려 말의 사회적 모순에 적극적인 비판을 하면서 혁명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정도전의 정치적 야심과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고려 말의 사회는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세력의 득세로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설상가상은 남쪽 바다 건너 왜구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국가의 위기설이 난무하고 있는 이 때 권문세족의 특권의식과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새로운 세력이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성리학에 입각한 도덕정치 회복을 추구하고 나선 이들이 신흥사대로 불리는 정치인들이었다.
신분적으로는 지방의 향리출신, 경제적으로는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정도전은 그 중에서도 가장 열혈남이었다.
 
1398년 8월 조선왕조 건국의 최고 주역 정도전이 피살되었다.
가해자는 바로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후에 태종>이었다.
도대체 무슨 악연이 있었길래 이방원은 정도전을 피습했던 것일까.
조선왕조는 건국 후 국호를 착수하였다.
그리고 그 실물의 역할은 정도전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라는 책을 통하여 조선 건국의 이념적 지표들을 설정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은 신하의 권력을 강조한 부분이다.
 
국왕의 자질에는 어리석음도 있고 현명함도 있으며 강역한 자질도 있고 유익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조선 국왕의 좋은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 잡으며 옳은 일은 받들고 옳지 않은 일은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들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국왕의 직책은 국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성계는 58세 노인으로서 정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틈을 바로 비집고 정도전은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재상중심의 건국이념 지표들을 설정해 나갔다.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으로 어린 세자 위에 군림하면서 재상이 주도하는 왕도정치를 꿈꾸었던 정도전의 꿈도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후 정도전은 역적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조선 왕조 내내 신원되지 못하다가 정조 대에 그의 문집<삼봉집>이 간행되면서 그 멍에를 벗었고 1865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궁의 설계자였던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문헌공이란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1995년에는 종묘공원 앞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고 최근에는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역사, 철학 등 다방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제 정도전은 권력 투쟁의 패배자였기에 감수해야만 했던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편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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