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미래신문
최종편집 : 2022.5.27 11:06
뉴스 피플 기획ㆍ특집 사설ㆍ칼럼 포토 학생ㆍ시민(주부)기자 독자마당
> 뉴스 > 오피니언 > 기고
     
서원<書院>의 유래
2020년 08월 21일 (금) 11:18:08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서원의 역사는 분명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서원제도가 꽃을 피운 것은 한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조에 유교<儒敎>가 나라의 국시<國是>가 되고 나서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순흥에 백운동<白雲洞> 서원을 창건하고 부터이다.
 
조선시대 교육기관 중 향교가 공교육기관이며 서원은 사교육을 담당하였다.
여기서 사교육이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의미의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과 대등한 의미를 지닌 교육으로, 단지 교육 주체가 공적기관이 아닌 사설교육기관이란 차이 밖에 없다고 하겠다.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선원인 백운동 서원은 그 표본인 중국 강서성 성자현의 북쪽 여산오로봉<廬山五老峯> 아래에 있는 주자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이라고 하겠다.
이곳은 당대<當代> 이발<李勃>과 그의 형 이섭<李涉>이 은거하여 백록<白鹿>을 기르며 독서를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백록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5대 10국<國> 때에는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여산국학<廬山國學>이라 하였으니 남송<南宋> 때 주희<朱熹>가 남강<南崗>의 지사가 되었을 때 이 서원을 다시 일으켜서 스스로 백록동서원의 원장이 되어 삼강오륜과 중용<中庸>을 학생에게 강의하는 등 동시에 천하의 학자들을 초청하는 등 유교의 이상 실현에 힘썼다.
 
이로부터 서원의 기틀이 합리화되어 삼강과 오륜, 그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서원이 소재하고 있는 곳인 영주시 순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흥이 현재는 영주시가 역사적으로 볼 때는 경북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영주는 본래 순흥 도호부<順興都護府>와 풍기군<豊基郡>과 영천현<永川縣>의 3개 고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영주시 아래에 풍기읍과 순흥면으로 소속되어 있다.
행정단위가 이렇게 된 데에는 남모르는 아픔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순흥이 과거에는 도호부를 둘 정도로 큰 고을이었으나 정축지변<丁丑之變>을 겪고 나서는 폐부<廢府>가 되어 그 존재조차 사라지는 비운을 겪은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정축지변이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순흥의 지리적 위치를 알 필요가 있다.
순흥은 경상북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백산<小白山> 아래에 자리 잡은 고을인데 산 너머로는 강원도 영월과 인접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은 바로 단종<端宗>이 유배되어 있던 청령포<淸泠浦>가 있는 고을이다.
영월의 단종과 광주에서 이배되어 순흥에 머물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엮어서 무자비하게 정치적 테러를 가한 것이 바로 정축지변이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째 왕자로 당시 순흥부사로 있던 이보흠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관노의 고변으로 화를 입은 인물이다.
 
이때 정축지변이 주동자는 물론 순흥에 살고 있는 무고한 사람까지 모두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순흥 도호부는 폐부가 되어 일부는 풍기군에다 소속시키고 일부는 영천현에, 또 일부는 봉화현에다 소속시킴으로써 순흥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특히 역모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들을 순흥의 청다리 아래에서 목을 쳤는데 심지어 젖먹이까지 포함되어 그들이 흘린 피가 10리나 흘러가다가 지금의 동촌마을에 와서 끝이 났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피끝마을이 되었다는 전설은 위에서 말한 역사적 비극을 잘 말해준다.
 
이런 역사적 비극의 땅에 조선 유학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백운동 서원이 세워진 것이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정통과 명분을 지키려다 현실정치를 중시하는 정치꾼들의 논리에 밀려 비극을 경험한 이 땅에 다시 유교의 본거지가 마련된 셈이다.
어쨌든 한국서원의 출발지에는 이런 역사의 우여곡절이 내재해 있다고 하겠다.
기왕에 청다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슬픈 전설과 역사를 하나 더 소개해 보자
 
청다리는 죽계천에 놓인 돌다리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복위에 동조했던 순흥의 수백명 선비들과 그 가족들이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이 때 눈물겹게 살아남은 어린 아이들이 청다리 밑으로 숨어들게 되었는데 이를 가엽게 여긴 사람들이 이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면서 청다리 밑에서 주어온 아이라는 말이 생겨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성미래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 고성미래신문(http://www.gof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 163(2층)  |  대표전화 : 055)672-3811~3  |  팩스 : 055)672-3814  |  사업자번호 612-81-25521
등록번호 : 경남 아 00137(인터넷신문)  |  등록일 : 2011년 4월 7일  |  발행년월일:2011년 4월 20일  |  발행인ㆍ편집인 : 류정열
청소년보호책임자 : 한태웅
기사 등 모든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 및 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2011 고성미래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gof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