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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의 굴욕
2020년 06월 19일 (금) 11:18:29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린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교 정책에서도 큰 변화를 수반하였다.

광해군은 전통적 우방국인 명나라와 신흥강국 후금<後金> 중 어느 한쪽에도 기울이지 않는 실리외교를 추구하면서 국방 강화에 힘을 쏟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직위 한 인조와 서인 정권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크게 비판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철저히 보답하지 않고 이제까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후금과 외교관계를 맺는 일을 국제적인 신의를 저버린 행위로 인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반정 이후의 외교정책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이제 오랑캐로 멸시할 수 있는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특히 누루하치에 이어 후금의 지배자가 된 홍타이지<후에 태종>는 조선에 대해 적대적인 성향이 강했다.
 
명나라를 능가한 군사강국으로 성장한 후금의 태종은 1627년 1월 휘하의 장군들로 하여금 조선 침공에 나서게 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의 시작이었다.
후금의 빠른 진격에 당황한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전세의 불리를 인식한 조선의 입장과 중원의 명 공격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던 후금의 입장이 맞아 떨어져 양국은 형제국임을 골자로 하는 강화를 맺고 전쟁을 종료하였다.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도 후금에 대한 조선의 강경책은 여전하였고 후금과 약조한 조항을 지키지 않으면서 후금을 다시금 자극하였다.
이어서 1636년 12월 15일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한 청 태종이 직접 조선 침공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산성<山城> 중심의 방어책만 고수하고 별다른 준비가 없었던 인조임금과 조정대신들은 다시금 피난길에 나섰다.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방향을 잡았지만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가는 길목까지 차단하고 있어 피난처를 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피난간 곳은 남한산성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곧 바로 청군에 의해 포위당했고 50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청의 대군에 포위당한 인조 및 남한산성의 군인과 백성들은 추위와 허기 그리고 포위한 청군이 쏘아대는 홍이포<紅夷砲>의 공격 속에 점차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판서 최명길 일파에서는 빨리 청에서 요구한 군신관계를 수용하고 화약<和約>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김상헌과 같은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버틸 방도가 없고 전쟁의 확산으로 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현실을 우려한 인조는 결국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항복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세손과 봉림대군 등 일부 왕족이 피난을 갔던 강화도가 1637년 1월 23일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도 항복의 시점을 앞당기게 했다.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쳤던 1637년 1월 30일 아침 인조는 마침내 서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내려왔다.
왕의 복장이 아닌 융복<戎服> 상태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인조를 재촉하여 청 태종이 마련한 수항단<受降壇>으로 내려오게 했다.
이 곳은 삼전도<三田渡> 즉 삼전나루였다.
당시에는 한강물길이 현재 송파구 삼전동까지 이어져 이곳에는 나루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삼전도의 수항단에는 전쟁의 승리자 청 태종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곧 이어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 행해졌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의 호령에 따라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 의식을 마쳤다.
조선은 인조가 머리를 조아리는 땅에 자리라도 깔아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청나라는 이마저도 거부하였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인조의 이마에 피가 흥건히 맺힌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들에는 인조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설사 피를 흘렸더라도 차마 이를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전까지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이었기 때문에 인조와 신하, 백성들은 모두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전쟁의 여파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끌려가 청나라 노예시장에 팔려갔다.
이 얼마나 처절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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