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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당풍경②
2020년 04월 10일 (금) 13:23:19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조 때 훈장은 대체로 수강료<受講料>인 강미<講米>의 다소로써 실력이 평가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파는 것 외에 다른 생활수단을 가지지 않은 몰락한 양반이거나 양반은 아니지만 지식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생원은 석 달간 백범의 사랑에서 기숙<寄宿>하며 훈장생활을 하다 해고된다.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해고 이유는 둔재인 자기 아들에 비해 백범의 우수함을 시기해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교관<敎官>직은 관료직으로서는 별로 매력을 갖지 못하던 한직<閒職>이었다.

그 직책은 출세를 보장해 주는 청요<淸要>직이 아니라 문신 중 좌천된 자들의 유배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향교의 교수관에 임명되어도 사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교관직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다른 직책에 비하여 낮아 기피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18세기 이전까지 향촌 사회에서의 서당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물들이 직접 운영하였기 때문에 훈장은 관학의 교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관지 진출이 막힌 불우<不遇>한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은 일정한 생활방도가 없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파는 직업적인 서당 훈장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의 직업적 권위는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백범일지에는 앞의 산골 서당과는 다른 형태의 서당이 등장한다.

정문재라는 훈장이 운영하는 서당은 요즘 말로 하면 고시전문 학원 내지는 족집게 과외교사가 운영하는 전문학원이다.

과거<科擧>의 구두시험인 제술<製述>에 대비하여 경전<經典> 읽기인 강독<講讀>과 글씨 쓰기, 문장 짓기에 치중한 수업을 진행한 서당이라 할 수 있다.

강독은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경전을 요약한 초집<抄集>을 외우는 것이 일이고 제술도 기출 문제의 모범답안을 중심으로 반복적인 연습으로 글짓기 하는 직업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실제로 거벽<巨擘>이라는 과문을 대신 작성해 주던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문헌에는 숙사<塾師>라는 이름의 선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들은 요즘말로 표현하면 사설학원에 고용된 전문 강사는 인기 강사라 할 수 있다.

정조대왕 시대의 정래교<鄭來僑>나 천수경<千壽慶>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정래교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인 풍산 홍씨 집안이나 청풍김씨 집안의 숙사로 있으면서 그들의 자제를 가르쳤다.

천수경은 양반신분은 아니지만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서당을 열어 서울의 부유한 중인의 자제를 대상으로 서당을 열었는데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학생 수가 계속 늘어나 300명에 이르렀다 한다.

학생 수를 줄일 요량으로 개인당 60전의 학비를 받았지만 학생 수는 항상 50~60명을 유지했다고 하니 서울에는 외형적으로는 300명의 학생이 다니는 대규모의 사설학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양반의 거주지역은 반촌<班村>이라 하여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양반의 거주지역이 아닌 곳은 여러 성씨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섞여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반들은 이런 마을들을 민촌<民村>이라고 불렀다.

물론 유력한 두서너 개의 양반 가문이 한 마을에서 같이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유력한 양반 가문이 마을의 중심에 살고 그 주위에 몇 개의 민촌이 반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반촌에는 명망 있는 학자들이 강학<講學>과 독서<讀書>하는 거처인 누정<樓亭>, 서숙<書塾>, 서당<書堂>, 정사<精舍>라는 이름의 건축물들이 서당의 역할을 하였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법물리 일원의 상산<常山> 김씨 가문의 인지재<仁智齋>, 구양재<龜陽齋>, 법천서당<法川書堂>, 괴음정<傀陰亭>, 두곡서당<杜谷書堂>, 물천서당<勿川書堂]>, 부암정사<傅岩精舍>, 서간정<西澗亭>, 기양정사<伎陽精舍> 등이 이러한 기능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은 이곳의 훈장으로 있었던 김기주<金基周>(1844~1882)의 묘갈명에 나오는 것인데 당시 문중서당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산 김씨 가문은 집안어른 가운데서 학문이 뛰어난 상우당<尙友堂> 김이작<김履灼>을 훈장으로 삼아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쳤다는 것인데 듣고 따른느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된 김구 선생이 다닌 서당의 풍경과 비교가 된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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