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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계비<繼妃>는 어떻게 영립하였을까
2020년 01월 10일 (금) 15:54:57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시대에는 왕비가 사망하거나 폐출되었을 경우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이렇게 들인 자를 계비라고 했다.

그런데 계비를 선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조선조 초기에는 궁궐안에서 후궁(첩)으로 생활했던 여이들 중에서 계비로 책립했다는 것이다.유교를 국시로 했던 조선에서 첩<妾>인 후궁이 처<妻>인 계비가 될 수 있을까

왜 문정왕후 때부터는 계비를 외부에서 뽑아왔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조선시대 계비의 선정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춘추와 맹자의 책을 읽어보면 첩을 처로 삼지 말라 하였지만 조선 초기에는 왕비 부재시에 후궁을 계비로 승격시킨 사례가 몇차례 있다.

아직 성리학 이념이 뿌리 내리지 못해 비빈<妃嬪>의 서열이 엄격하게 잡히지 않았으며,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세력가의 여식을 후궁으로 삼는 일이 간혹히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첩이 처가 되지 못한다는 원칙의 원리를 깨고 문종의 세자빈이 후궁 중에서 선정되면서 후궁 출신의 왕비가 등장할 수 있는 전초가 마련됐다.

특히 간택으로 선발했던 문종의 세자빈이 두 번이나 폐출되면서 후궁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경험은 후궁 출신의 계비가 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종의 첫 번재 세자니 휘빈<徽嬪>은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문종이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태워 술에 타 먹이는 등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어 2년만에 쫓겨났다.
두 번째 세자빈 純嬪>은 투기 및 궁녀와의 동성애로 폐출됐다.

세자빈이 거듭 폐출되자 세종은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새로 얻는 것과 본래부터 궁중에 있으면서 부인의 도리에 삼가고 공손한 사람을 뽑아 세우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을 수가 있겠는가”(세종실록 세종 18년 12월 28일)하며 검증되지 않은 규수를 간택하기보다 검증된 후궁을 정빈<正嬪>으로 올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이로써 후궁이었던 양원<良媛> 권씨<權氏>가 왕실의 첩의 신분에서 정처로 승격된 첫 번째 사례가 됐다.

후궁 출신이 세자빈이 된 이후에 계비도 후궁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전례가 됐다.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와서 생활해 보게 하고 검증이 된 자를 정비 자리에 올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선초기에 선발된 계비들은 예외 없이 후궁 중에서 선발됐다.

예종의 비<妃> 안순왕후, 성종의 비 제헌왕후(페비윤씨) 등이 그들이다.

중종의 비 장경왕후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이 일정한 시기에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목된다.

한편 후궁 출신 계비는 입궐 시기를 기준으로 도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정비 생전에 후궁으로 들어와 있다가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 계비로 승격된 경우로 페비윤씨와 정현왕후가 해당되고, 다른 하나는 왕비 사후에 후궁으로 먼저 선발 후에 계비로 책립한 경우로 안순왕후와 장경왕후가 이에 포함된다.

종중의 첫 번째 계비인 장경왕후는 후궁 중에서 선정하였지만 두 번째 계비를 선정 할 때는 그 선정 방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 후궁 출신의 계비를 선발하던 전례에서 벗어나 외부에서 새로 간택하여 선정하였던 것이다.

처음으로 외부 간택에 의해 선발된 계비가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를 외부에서 간택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리학적 학문의 질서가 정착되고 있었던 시대 속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고, 그 다음으로는 당시 후궁이었던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경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지적할 수 있다.

중종 때 문정왕후가 처음으로 간택에 의해 계비로 선정된 이후 외부 간택이 계비 선정 방법으로 완전히 정착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있어서는 당쟁으로 인해 특수하게 계비의 자리에 오른 장희빈을 제외하고는 계비가 모두 외부에서 간택된 것이다.

인목왕비(선조), 장렬왕후(인조), 인형왕후(숙종), 선의왕후(경종), 정순왕후(영조), 효종왕후(현종), 순종왕후(순종)가 외부에서 간택한 계비들이다.
또한 중종이 처음 시행했던 왕의 친영의 이후에 정비나 계비가 치른 왕의 혼례식에서 여외 없이 지켜졌다.

영조 때에는 봉영례<奉迎禮>가 시행되었으며, 국조오례의 기록과는 달리 친영례가 완전히 정착되었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후궁 출신의 계비가 영원히 사라진 것은 숭종 때였다.

1701년(숙종27)에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무고<巫蠱>의 옥사 사건이 일어난 이후 숙종은 이제부터 나라의 법전<法典>을 명백하게 정리하여 빈어<嬪御>가 후비<后妃>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숙종실록(숙종 27년 10월 7일) 공표하면서 후궁으로 있던 여자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원칙적으로 붕쇄해 버렸다.

생각해 보건데 많은 계비가 출현했던 조선왕조 오백년에 각 계비 한명 한명의 사연들을 살펴보는 것도 조선시대의 흘러간 연사를 이해 하는데 씁씁한 재미를 안겨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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