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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자 송시열
2019년 12월 06일 (금) 11:47:41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조선후기 인조 때부터 숙종 대에 이르기까지 늘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서있었던 우암 송시열은 조선조 역사상 손꼽히는 학자이다.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 후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정치의 중심에 늘 이름을 들낸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건이나 그의 이름이 등장되어 있는 것 또한 그의 위상과 명성을 나타내고 있다.
당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에 여러 대의 왕의 참모 역할의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송시열<宋時烈>은 선조 40년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부친 송갑주와 어머니 곽씨<郭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영보<永甫> 호는 우암<友庵>, 우재<友齋> 등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옥천 땅에서 태어난 후 8세가 되던 해에 회덕<懷德>, 송촌<松村> 천척인 송이창 <宋爾昌>의 집에 가서 1년 여를 살면서 그의 아들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송이창에게 학문을 배웠다.

1625년(인조5) 나이 19세에 한산 이씨 여자와 혼인하였으며, 24세 때에 김장생<金長生>(1548-1631)을 찾아가 근시록, 소학, 심경 등을 배웠다.

1632년 송시열은 송준길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 온진송씨의 본향인 회덕 송촌으로 이사한 후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강학 활동을 했다.

이듬해에 생원시에 장원급제 하였는데 당시 시관<試官>이었던 최명길은 “이글을 지은 선비는 마땅히 세상을 울리는 큰 선비가 될 것이다”라며 송시열의 자질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1635년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이때의 인연은 훗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북벌이라는 운명의 끈으로 이어지게 된다.

1636년 12월 30세의 나이로 최대의 국난인 병자호란을 당했다.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간 송시열은 전쟁이 어느 정도 수습된 1638년에는 충청도 황간의 냉천으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이 곳 황간 옥천 영동 인근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는데 송시열이 후학들을 양성했던 정사<精舍>를 모태로 숙종 때인 1717년 서원이 세워졌고, 영조 때 한천<寒泉>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42세가 되던 1648년(인조26) 송시열은 공주의 진잠<鎭岑> 성전<聖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곳은 현재의 대전시 유성구 학하동 일대로 송시열과 대전과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는 곳이다.
지형이 넓고 한적한 것을 사랑하여 못을 파고 서재를 건립하고 학문을 강론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1674년 14대 왕 숙종의 즉위는 우암 송시열에게 더욱 정치적 부담을 가져왔다.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대왕이나 아버지 현종대왕도 어려워했던 정계 최고의 인물이고 대학자인 송시열을 숙종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약까지 내리면서 영원한 악연을 이어가게 된다.

남인들의 거듭된 정치적 공세로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을 거쳐 경상도 거제 등지로 이배되면서 숙종 초반에 그의 이력에는 유배기가 기록되었다.

이 시기에 주자대전을 편찬하고 이정분류<二程分類>를 편찬하는 등 송시열은 주자학 이론을 더욱 체계화 하는데 전념했다.

1688년(숙종4) 숙종의 후궁 장씨<장희빈>가 아들<후일경종>을 낳았다.
정비 인경왕후와 계비 인현왕후에게서 왕자 출산이 없자 숙종은 1689년 왕자의 책봉을 정하기 위해 대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결과 장희빈의 소생을 왕자로 책봉하기로 의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송시열은 노론의 대표로 다시 한 번 숙종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글을 올리게 된다.
젊은 중전이 있는데도 후궁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종법질서나 예치로 보아 잘못된 것임을 낱낱이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즉위 초부터 악연이 있었던 송시열의 상소문을 본 숙종은 대노하여 바로 삭탈관직의 명을 내렸고 기회를 잡은 남인이 송시열을 탄핵했다.

원자 정호와 문제는 결국 6년 만에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송시열은 결국 83세의 나이에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도 계속 숙종을 자극하는 상소문을 올리다가 한양 압송의 명을 받게 된다.

제주에서 육지로 나온 그는 광양에서 수제자 권상하 등의 영접을 받으면서 자신을 올바른 길을 가려다가 죽는 것이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밝혔다.

83세의 고령이지만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이 컸기에 민암 등의 남인들은 숙종에게 거듭 송시열의 처형을 요청했다.

마침내 숙종은 정읍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정읍에서 마지막 유언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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