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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을 대적할 김유신의 검도<劍刀>
2019년 06월 21일 (금) 11:36:44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 제명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5월 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하는 신라군은 백제의 도성 사비성 남쪽에서 7월 10일 당나라 군대와 회동하여 사비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5만 군대를 동원하여 진군을 개시했다. 이 때 서해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는 소정방<蘇定方>을 대장군으로 하는 13만 병력이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약속 장소로 나아가다가 뜻밖에도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오천 결사대에 의해서 진격이 가로 막혔다. 신라군이 네 번이나 싸웠으나 모두 패전하는 바람에 신라군의 군중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사기를 만회하기 위해서 신라는 비상대책을 동원했다. 김유신의 동생이자 우장군 제2부대 사령관이었던 김흠순<金欽純>이 종군하고 있던 그의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내서 위태로움을 보고 묵슴을 바쳐서 충효를 온전하게 보존하라고 하였고 반굴은 부명<父命>을 받들어 적진에 뛰어 들어가서 역전<力戰>하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신라군의 사기는 높아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좌장군 곧 제1부대 사령관이었던 품일<品日> 역시 종군하고 있던 자기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내어 말했다. “내 아들 나이가 16세에 불과하지만 자기<志氣>가 용감하니 오늘 싸움에서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 관창 역시 부명을 받들어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사로잡혀 백제 계백 장군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니 아직 나이가 어린지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서 보내주었다. 관창이 돌아와서 아버지 풍일에게 “저가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가서 적장을 죽이고 깃발을 빼앗아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붙잡혀 계백장군에게 끌려가 이번에는 계백이 그의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되돌려 보냈다. 품일 장군이 나아가 머리를 드니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품일이 말했다. “내 아들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신라국을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니 충신이로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여 직시 출군했다. 신라군이 백제군 진영으로 돌진하여 백제군이 대패하고 계백장군도 씁쓸하게 전사했다. 드디어 신라군은 뒤늦게 당나라 군대와 회의하기 위해 회동 장소로 나아갔다. 이 때 당나라군인 대장 소정방은 신라군 대장 김유신이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신라군 독군 김문영<金文穎>의 목을 베려고 했다. 이 때 김유신이 앞에 나와서 말했다. “대장군이 황산 싸움에서 어떠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뒤늦은 것으로 죄를 삼으려 한다면 나는 죄 없이 치욕을 당할 수 없다. 만약 문영을 건드린다면 나는 당군과 먼저 싸워서 결전을 한 뒤에 백제를 쳐부수겠다.” 이렇게 말하는 김유신은 노기가 충천하여 머리털이 꼿꼿이 서고 허리에 찬 칼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결기<決氣>에 찬 김유신의 위엄있는 모습에 기가 질려버린 소정방은 어찌할 줄 모르는데 그의 참모 동보량<董寶亮>이 넌지시 소정방의 발등을 밟으면서 “만약 문영의 목을 벤다면 신라군 속에 장차 번고가 생길 것입니다.” 라고 하니 소정방이 슬그머니 김문영을 놓아주었다. 김유신의 승리였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로 심대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김유신은 66세의 백전노장으로서 소정방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 신라군의 기를 죽임으로서 실질적으로 신라군까지 소정방의 자기 휘하에 두고 부리는 지휘권을 확보하고 나아가 더 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만 뜻밖에도 김유신의 일격에 그의 서슬이 무너지고 말았다. 일종의 기 싸움에서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기 좋게 패배한 것이다. 그 후 신라는 독자적인 지휘권을 확보할 수 있었고 나아가 당군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었다. 김유신은 소정방 일인을 상대로 하여 그 기를 꺾음으로서 당나라 13만 대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유신이 검도의 대가로서 평소 검도 수련을 통하여 칼의 정신을 내면화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검도의 대가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유사> 김유신이 18세 되던 해 혼자 보금을 지니고 인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을 피워 놓고 재배한 후 하늘에 고하기를 “중악에서 한 맹세와 같이 하고 계속하여 빌기를 천관<天官>은 빛을 발하여 이 보검에 영험을 내리소서”라고 했더니 사흘째 되는 날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성좌의 빛이 환하게 내려 뻗치니 칼이 움직였다. <삼국사기>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시험이 있었는데 모두 일등을 했다.
왜 당나라가 백제를 치는 전쟁에 무려 13만의 대군을 파병 하였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국을 돕기 위해서 참전했다면 신라군보다 무려 3배나 많은 군대를 동원한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당의 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그 여세를 몰아서 신라가 지쳐 있을 때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당의 이러한 계획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라가 운용한 숙위<宿衛>제도 덕분이었다. 신라에서 당의 황실에 공식적으로 파견한 황제 경호원인 숙위는 바로 신라의 왕족인 으뜸 귀족이므로 국공<國公>의 아들이며 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신라조정에는 위 두 분의 숙위가 있기 때문에 당나라 조정의 정치 현황을 환하게 알고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다. 김유신은 13만 당군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당장은 당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백제를 멸망시킬 때 까지는 참기로 했다. 그러나 앞으로 당의 야심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이들이 제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김문영 사건을 계기로 김유신은 자신의 결기<決氣>를 드러낼 수 있었고 이것은 당나라의 야심을 꺾고 소정방의 계획을 좌절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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