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한 시간이란 듯 없고 허망하다. 그 앞에 서면 싸움판과 같이 멀쩡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빛바래고 무력해 진다. 그래도 시간에게 늘 감사하다. 고정된 것이 없음을 일깨워주고 지금 이 순간의 값짐을 경험케 해주니까.
시간이란 형식의 은유를 알고 있다면 해돋이 따위는 보러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새로 돋는 해가 바로 어제의 그 해와 같음을 알기에 개념의 수사에 속아 놀아나지 않는 것이다.
현제 바깥을 둘러보면 늘 허탈하다. 기름 값은 점점 올라가고 자동차 운행은 더 늘어나고 빙하는 점점 녹아내리고 펭귄은 죽어가고 있다. 북경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는 스모그로 대낮에도 깜깜 빛을 잃어 폐병 걸린 사람처럼 회색빛 얼굴이다.
허탈(虛脫)이란, 몸에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멍한 상태를 말한다. 허탈한 세상이 볼수록 참 눈부시고 눈물겹다. 허탈을 만드는 근본은 자본주의다. 이 세상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캐내서 팔아버리려 한다. 피도 살도 뼈도 영혼도 지혜도 골수도 값이 나가는 것은 모두 파헤쳐 거들을 낸다. 인간의 실체도 대지도 그렇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얼굴도 길도 집도 팔자도 다 고쳐 댄다. 아름다움도 고통도 만들고 없앤다. 역사는 돈을 앞세워 굴러간다. 그 관계는 눈물겹도록 현란하다. 무엇이나 통합시키고 분열시킨다. 무엇이든 모으고 나누기도 한다. 분화 분과 독립 통폐합.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들이나 자본주의가 거느린 어휘들 언어 가족들이다.
자본은 그 자식들을 기르고 번식한다. 정치와 지식은 그들의 시녀다. 자본의 파수꾼이 되고 불쏘시개가 되고 침대가 되고 드라마가 되고 칼이 된다. 대학 지성 운운하나 별것 아니다. 이미 자본의 손에 영혼을 팔고 죽었다. 고금소총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으로는 아름다운 여인이 옷 벗는 소리<今人善聽····佳解裙聲>라고. 지난날 그렇게 아름답다 청하던 지성의 치마를 누가 벗겨왔나.
자본이다. 자본은 지성과 은밀하게 거래하며 영혼을 팔라고 유혹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신비와 권위들을 발가벗겨 놓았다. 그래서 재미있는가? 라고 묻고 싶으나 그럴 필요 없다.
모든 것은 될 대로 된다. 흘러갈 대로 변화한다. 별과 같이 빛나고 달과 같이 밝고 맑은 내 사랑. 그대여 가지마오 가지마오 라고 울부짖어봤자 가버릴 것은 가고 또다시 올 것은 온다. 오직 그것을 직시할 일이다. 세상은 늘 진리가 올바르게 실현되지 않아 혼란해졌다는 식의 위정척사적인 논법에도 속지 않아야 한다. 흔히 지껄어대는 진리는 이렇고 인문학은 저렇고 진보는 이렇고 보수는 저렇고 식의 입 바림 논리에도 속지 않아야 한다. 허탈을 넘어서려면 우리를 속이는 모든 개념과 형식부터 넘어서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오늘을 살고 있는가? 말끝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 하는 나는 누구인가? 수많은 어휘들을 거느리고 거리에 나선 전사(戰士)들은 정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세상을 좀 먹는 너는 누구인가? 대지의 피를 빨아먹는 너는 누구인가? 이 세상을 허탈로 몰고 가는 너는 누구인가? 이런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한 해를 보낸다는 것은 나의 때를 씻어내는 일이다. 바깥의 해맞이에 안달 말자. 우선 내 허탈의 장막부터 걷어내자. 때를 벗겨내면 그 자리에 태양이 떠 있다. 기를 쓰고 뚜벅뚜벅 그런 자신의 내면에 해맞이 하러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밝은 나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