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단법인성균관 전부관장

1636년<인조14> 음력 3월초 조선조정에서는 청나라에 복종하여 항복하느냐 여부를 놓고 격렬한 언쟁(言爭)이 벌어지고 있었다. 척화파(斥和派:청나라를 배척하는 당파) 관료들은 개,  돼지만도 못한 청나라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국가가 패망할지라도 용감하게 전쟁을 하자고 주장했다. 척화파는 이어 신복을 요구하는 사실을 기록한 국서를 전달하러 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머리를 베어 죽이라고 주장했다.
주화파(主和派:청나라에 아부하는 신하들) 관료들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군사력과 경제력이 막강한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국력을 보강한 뒤에 후일을 기약하자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인조대왕은 양자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잡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가 주장하는 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해 3월7일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조선조정이 청나라 요구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나라의<지금의 중국>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을 기록하여 인조대왕 임금이 평양감사에게 보내는 극비 교서(敎書)를 가지고 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청나라 장수인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삼엄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도망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땅에서 국가의 밀서(密書)를 빼앗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척화파니 주화파니 놓고 논쟁만 무성한 와중에 정작 조정에서 지방관청으로 연결되는 정보전달 체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무질서와 무방비 상태를 간파하고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침범하는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1636년<丙子> 12월 청나라 군대 30만 명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폭풍우 같이 밀고 들어왔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 외곽의 산성에 주돈하고 있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내지 못했다. 더욱이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담당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범했다는 최초의 정보를 못들은 척 했을 뿐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대항하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났다는 속보가 전해진 12월14일 서울 장안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인들 힘없는 부녀자들의 울부짖음 속에 피난 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관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 하였다. 인조임금은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국왕의 위패<신주>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인조대왕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도성에서 김포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대왕은 속수무책으로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나루터에는 배를 타기 위해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그 당시 검찰사 김경징의 허락이 없이는 어떤 배도 출항할 수가 없었다.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다. 그는 12월14일 인조로부터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의 안전을 책임지는 검찰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막중한 직책을 원만이 수행할 만한 인물이 못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공과 사를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집안의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재물 궤짝들을 먼저 배에 실어 날랐다. 심지어 많은 노복들까지도 빼놓지 않고 강화도로 옮겼다. 그 와중에 세자빈까지도 배를 타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배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세자빈이 분노하여 큰소리를 지른 뒤에야 배에 올랐다.
검찰사라는 직책을 내세워 왕세자빈까지 무시했던 김경징이 일반백성들을 배에 태워줄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과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실어 나른 뒤에는 사용했던 선박들을 전부 강화도 쪽 해안에 묶어버렸다. 피난민들이 강화로 많이 건너 와 바야 득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이 빠져라 배가 오기를 기다리던 김포 쪽 나루의 피난민들은 아우성을 쳤다. 이윽고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다가온 것은 배가 아니라 청나라 군사의 기마부대였다. 그들은 청나라 적군들에게 유린되고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1636년 12월은 살풍과 악풍으로 온 나라에 먹구름이 덥혀 암혹천하를 이루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