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가을이 문턱에 왔음은 벌초 행렬에서 보인다. 흩어진 조상들의 묘를 한 곳에 모운 자손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일가친척들이 모여 전쟁터에 작전 짜듯 조를 짜서 이산 저산 정벌하고 다시 모여 조촐히 삼겹살 파티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몇 해 전 나의 부임지는 바다가 보이는 판곡리 산 묘소였다. 준비된 장수에게 제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도 대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산세와 지리를 꿰뚫으며 잔디와 잡초의 수준을 알고 있는바, 대충 차림과 낫 한 자루 들고 갔다가 호되게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이맘때에 벌들은 여름내 양기를 한 것 끌어올려 독성이 가장 강할 때다. 그중에 땅벌이라 놈은 일반 말벌보다 작지만 집단 공격의 집적도가 매우 강해 망토나 비닐보자기를 쓰지 않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땅 속에 집을 짓는 특성상 그들 보금자리는 외관상 전혀 눈치를 챌 수가 없다. 벌에게 원수진 적 없고, 모르고 살짝 풀만 벴을 뿐인데 그들 공격은 인정사정없다. 서너 방 쏘인 채 낫을 버리고 허겁지겁 도망하는 모습이 작전에서 지고 수비에서 진 패장이 아니라 패잔졸(卒)이 돼 버렸다. 제법 멀리 도망쳤어도 진한노랑과 검정색의 교차, 버너 망사 같은 눈알, 씰룩거리는 엉덩이 독침이 환영처럼 아롱거려 애써 머릴 흔들었다. 그리고 낫은 뺏기듯 했으나 패잔병답게 노래 일발 장전하고 쐈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 영화「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이 부를 때는 그런대로 멋있더니만, 왜 하필 이때 떠올라 ‘비참한 판곡리 산길’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쏘인 자리에 소주 한 병 까 붓고 높아만 가는 하늘을 처량히 보았다.

여기까지 나를 이끈 조상을 원망할까. 건드리지 않았는데 공격하는 땅벌을 원망할까. 재수 없게 짜진 분임조를 원망할 것인가. 아무튼 내가 아닌 다른 원망거리를 찾지 않으면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런 후 TV를 보니까 땅벌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국립생물자원관에서의 발표는 땅벌 독이 살모넬라균과 포도상구균의 백신에 최고의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는 ‘땡벌’, 경상도에서는 ‘땡삐’라 하는데, 땅벌은 꽃에서 꿀을 채취하는 게 아니라 나무의 진액이나 과일즙 등에서 영양분을 모으거나 사람이 버린 음료수 캔 등에서 당분을 습취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말벌보다 작으면서 샛노랗고 새까만 줄무늬가 쓰레기통 주변에 맴도는 벌은 거의 땅벌이라 보면 된다는 것이다.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지 않지만, 적으로 판명되면 꼬리에 독침뿐만 아니라 작은 옷 틈새에도 기어들어가 강력한 턱으로 기관총을 볶아대듯 살점을 물어뜯는다는 것이다. 쓰레기통 주변 한두 마리라 깔보다간 큰코다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금세 촛불 들고 떼로 몰려와 공격을 퍼붓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개미와 벌은 사회성이 출중하고 계급의 분화가 철저하여 하극상은 있을 수 없는 줄 안다. 하지만 땅벌이놈들! 이놈들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뇌세포인자를 가진 놈이다. 여왕도 갈아치울 수 있는 족속이다. 샛노란 리본을 단 ‘땡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 여왕은 일벌의 게걸스러운 먹이가 되고 만다. ‘성공한 쿠데타는 역사가 된다.’하지 않은가. 아무쪼록 성묫길 ‘땡삐’한테 구타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바랄 뿐이다.